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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귀토’- 돌아온 해오름극장 꽉 채운 우리 소리로 후련하게 샤워

중앙선데이

입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6월 2일~6일

국립창극단이 오랜만에 새로운 대작으로 돌아왔다. 3년 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을 앞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첫 번째 시범공연으로 선보인 ‘귀토’다. 창극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 ‘변강쇠 점찍고 옹녀’로 유례없는 100회 공연 기록을 세우고 세계 공연의 메카인 프랑스 테아트르 드라빌에서도 극찬받았던 고선웅 연출·한승석 작창 및 음악감독 콤비가 다시 뭉쳐 저력을 과시했다.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라니 판소리 ‘수궁가’인가 싶지만,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번외편이랄까. ‘오즈의 마법사’를 재창작한 뮤지컬 ‘위키드’가 누구나 아는 동화의 이야기틀을 빌려 해묵은 교훈을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적 화두인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을 논했듯, ‘수궁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 ‘귀토’ 역시 고전의 동시대적 재해석이란 어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는 달라도 고선웅 특유의 인간미 가득한 유머 감각이 해학 넘치는 수궁가의 DNA를 확실히 잇고 있다. 음악도 총 60여 넘버 중 수궁가 원전에서 가져온 7, 8개만 빼면 한승석이 완전히 새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없다. 마치 19세기 명인들이 지은 듯 의성어, 의태어 가득한 찰떡 같은 언어 유희와 자연스런 리듬감은 과연 이들을 ‘21세기 창극의 계승자’라 부를 만 하다.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창극은 소리에 방점이 찍히는 음악극이지만, 임금을 위한 지극한 충성심과 약자도 꾀를 내면 강자를 물리칠 수 있다는 ‘수궁가’의 해묵은 교훈은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에게 호응받기 어렵다. 대신 고선웅은 자라가 토끼를 꾀기 위해 산중살이의 고됨을 강조하는 ‘삼재팔란’ 대목에 포커싱했다. 간을 빼놓고 왔다고 꾀를 부려 상황을 모면한 토끼의 이야기를 그 아들 토자의 이야기로 확장시킨 아이디어에 무릎을 친다. 용케 도망 나왔지만 어이없게 독수리에게 잡혀간 부친을 보며 고달픈 삶을 도피하고자 제 발로 수궁으로 들어가는 토자는 기성세대의 상식을 넘어선 요즘 MZ세대의 현실에 다름 아니다.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뭍이나 물이나 거기서 거기로구나’‘사는 게 고달파도 내 터전이 제일이야’ 같은 가사처럼, 이 무대를 관통하는 건 ‘헬조선’이 우울한 MZ세대들에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만한 것이라는 위로를 넌지시 건네는 고선웅식 힐링 코드다. 그저 창극이라는 전통의 보전을 위해 단순한 옛날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메시지를 고민한 결과다.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그런 이야기를 담은 ‘젊은 소리’도 듣기 좋았다. 완벽한 현대어로 쓰여졌으면서도 정광수제 ‘수궁가’의 주요 곡조를 최대한 살리고 진양부터 중모리‧자진모리‧엇모리‧휘모리까지 다양한 장단도 치밀하게 구성해 창극의 양식미를 보존했다. 김준수·유태평양·민은경 등 차세대 블루칩들이 전면에 나서 시김새 등 탄탄한 전통의 문법이 살아있으면서도 ‘명창 선생님’들과는 결이 다른 호기로운 젊은 소리의 향연이 ‘이것이 MZ세대의 창극’임을 선언하는 듯했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세상에서 점점 설자리가 좁아지는 전통 분야에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희망이랄까.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새로 태어난 해오름극장과의 궁합을 고려한 무대 미술도 주목할 만 했다. 올해 제31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무대 디자인의 거장 이태섭이 1500여 개의 각목을 촘촘히 이어 붙여 무대 전체를 언덕으로 만들고, 중앙 바닥에는 가로·세로 8미터의 대형 LED 스크린을 설치하고 새로 도입된 승강 무대를 활용해 전통과 현대의 조화에 포커싱했다. 별다른 대도구 없이 후면 스크린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LED 스크린에 투영된 상징적이고 미니멀한 영상으로 커버한 다양한 공간 표현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귀토 [사진 국립창극단]

하지만 ‘돌아온 해오름극장’의 규모에 걸맞는 대작을 의식한 탓인지 ‘투머치’의 느낌도 없지 않았다. 창극단원 전원을 포함한 총 54명이 무대에 오르고 객원 연주자와 지휘자까지 15명의 악단이 동원된 것. 마당놀이처럼 흥겨운 길놀이로 시작과 끝을 맺는 축제 분위기로 새 극장을 맞는 것은 적절해 보였고, 엔딩에 코러스의 고고천변 떼창은 새 극장의 업그레이드된 음향 시스템 안에서 소리로 원없이 샤워한 듯 후련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코러스의 비중이 과해 보였다. 오히려 국립창극단에 이런 면면들이 있었나 싶을 만큼 다양한 배역을 재간넘치게 소화하는 베테랑 단원들이 골고루 잘 보이게 배치한 점이 돋보였다. 특별 출연한 아홉 살 꼬마 소리꾼과 아흔살 가까운 ‘늙은 소리꾼’까지, 온 세대가 어우러져 각자가 제 역할을 하는 무대를 정말 얼마 만에 본 것인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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