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모피 집착녀 잊어라, 디즈니가 악녀 크루엘라에 눈 돌린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1.06.03 11:57

업데이트 2021.06.03 14:01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101마리 달마시안’ 속 동명 악녀의 탄생기를 그린 디즈니 실사영화 ‘크루엘라’(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가 지난달 26일 개봉해 8일만에 38만 관객을 동원했다. 흥행 정상에 군림해온 액션 블록버스터 ‘분노의 질주:더 얼티메이트’를 제치고 지난 2일 박스오피스 1위로 역주행하면서다. 메가박스‧CGV‧롯데시네마 등 주요 멀티플렉스 실관람평도 10점 만점에 9점대를 웃돈다. 관객들은 “이 시대 최고의 관심종자 크루엘라. 시원시원하고 재밌었다” “디즈니에 이런 캐릭터가 있는지 몰랐다”며 “디즈니판 조커, 빌런의 탄생”(이상 메가박스 실관람평)에 환호하는 분위기다.

25년 전 '101 달마시안' VS '크루엘라'
비교로 보는 디즈니 실사영화 여성 전략

디즈니는 왜 악녀 크루엘라를 소환했나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1961), 실사영화 ‘101 달마시안’(1996)에서 달마시안 강아지들을 납치해 모피코트를 만들려는 미치광이 동물학대범으로 그려졌던 크루엘라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조명한 결과다. 2003년 미국 영화연구소 선정 지난 100년간 최고 악당 50위 중 ‘배트맨’(1989)의 조커(46위)까지 제치고 39위에 오른 크루엘라. 디즈니는 왜 이 무시무시한 악녀를 다시 소환했을까. 시리즈를 재정비한 이번 프리퀄 영화 속 달라진 점들을 통해 디즈니의 새 전략을 가늠했다.

1961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 속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1961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 속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가장 눈에 띄는 건 크루엘라의 풍부한 전사다. 글렌 클로즈가 연기한 1996년 영화까지 크루엘라는 거의 알려진 전사 없이 부유한 악당으로만 그려진 터. ‘라라랜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배우 엠마 스톤이 바통을 이어받은 이번 프리퀄은 25년 전 당대를 무대로 한 첫 실사판보다 더 20년 전인 1970년대 런던으로 시계를 돌렸다. 런던의 소매치기 고아 소녀가 된 크루엘라가 최정상 패션디자이너로 자수성가하기까지 반란의 여정을 펼친다. 젊은 재능을 착취해온 패션계 악당 남작 부인(엠마 톰슨)을 여러 의미에서 물리치고서다.

착하기만 한 공주보다 요즘 세대에 더 와 닿는 야무진 캐릭터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각본가들이 뭉쳐 빚은 여자들의 알력 다툼도 흥미롭다. 영화 ‘아이, 토냐’에서 미국 ‘국민 밉상’ 피겨선수의 실화를 공감 가게 그렸던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이 매력적인 악녀 연출 솜씨를 또다시 발휘했다.

동물학대범은 잊어라, 자수성가한 독신녀 크루엘라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주인공으론 격에 맞지 않는 동물학대범이란 악명은 사실 오해란 식의 사연도 풀어냈다. 달마시안과 구구절절한 악연을 설명하면서도, 유기견‧장애견 등을 애지중지하는 감춰진 면모로 강아지 납치로 얼룩진 이미지를 세탁한다. 그러면서도 예전 버전들 속 크루엘라의 사소한 단서들을 절묘하게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101마리 달마시안’ 시리즈의 원작은 실제 퐁고란 이름의 달마시안 개를 키웠던 영국 작가 도디 스미스의 1956년 소설. 이후 5년 만에 나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를 토대로 젊은 작곡가 로저와 전업주부 아니타 부부가 키우는 달마시안 부부 퐁고‧퍼디가 악당 크루엘라에게 납치당한 15마리 강아지를 찾아나선, 말하는 동물들의 우화였다. 1996년 영화는 이를 당대 현실 무대로 옮겨 인간 캐릭터에 보다 비중을 실었다. 로저(제프 다니엘스)는 컴퓨터 게임 디자이너가 됐고, 아니타(조엘리 리차드슨)는 패션 디자이너로 시대 변화에 발맞춰 없던 직업이 생겼다.

결혼보다 일 택한 페미니스트 아이콘

1996년 디즈니 실사 영화 '101 달마시안'에서 글렌 클로즈가 연기한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1996년 디즈니 실사 영화 '101 달마시안'에서 글렌 클로즈가 연기한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그럼에도 일보단 무조건 결혼을 택하는 아니타의 의존적인 태도(그는 무슨 결정을 하든 남편 혹은 유모에게 묻는다)는 여전했던 터. 이에 대립하는 캐릭터가 바로 아니타가 다니는 패션회사 사장 크루엘라(글렌 클로즈)였다.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에선 아니타의 학창시절 부자 친구이자, 패션에 과하게 집착하는 젊은 여성으로 그려진 크루엘라는 이 첫 실사판에서 성공한 독신 여성이란 점이 한층 부각됐다. 그는 “여자의 재능을 가장 많이 사장시키는 건 전쟁이나 기아, 질병, 재난보다 바로 그 결혼”이라 말하고, 임신한 아니타가 회사로 복귀하지 않으려 하자 “안됐다”며 실망하기도 한다.

미국 타임지는 최근 기사에서 이런 크루엘라 캐릭터가 “성공적인 경력과 자녀 또는 남편을 갖지 않기로 결정한 일부 팬에게 페미니스트 아이콘이 됐다”고도 짚은 바다. 이번 프리퀄은 이전 영화들에서 과장된 화장, 모피에 대한 집착, 생명경시적인 독설 속에 악녀 캐릭터 일부로 뭉뚱그려진 크루엘라의 이 독립적인 면모를 제대로 꽃피운다.

동화세계 탈출한 현대판 디즈니 주인공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크루엘라'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는 최근 내놓은 실사판 중에서도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 강인한 여성에 초점 맞춘 작품들로 큰 흥행을 거둔 터다. 그런 흐름 속에 이성애에 목매는 대신 자신의 꿈을 개척하는 데 더 집중하는 이번 영화의 크루엘라는 사랑 탓에 운명이 꼬여버린 디즈니의 또 다른 악녀 영화 ‘말레피센트’보다 더욱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귀족 가문을 등장시키면서도 권력관계보다 동등한 동료애에 힘을 실은 인물관계는 그간 왕실‧귀족을 주로 다루며 최근작에서도 봉건주의적 계급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받아온 디즈니의 일종의 세대교체 선언처럼 다가온다.

또 ‘크루엘라’는 디즈니 실사영화 중 최초로 동화세계를 벗어난 작품이란 점도 주목된다. 히어로 명가 마블과 한지붕 가족이 된 영향일까. 살인‧방화·절도 등 범죄영화의 한탕 재미를 버무리면서도 디즈니표 권선징악을 최악에 차악으로 맞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챙겨낸다. 무도회 드레스에 국한됐던 공주들의 화려한 의상을 현실 인물들 속에 펼쳐낸 점은 향후 디즈니가 자신들의 강점을 어떻게 현대화시켜나갈지 지켜보게 만든다.

이미 주인공 인어공주는 흑인으로, 바닷속 마녀는 백인으로 인종을 바꿔 화제가 된 ‘인어공주’와 ‘500일의 썸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마크 웹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 ‘백설공주’ 등 실사판 리메이크가 기다리는 터. 원조 글렌 클로즈와 엠마 스톤을 함께 캐스팅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대부 2’ 방식 ‘크루엘라’ 속편에 대한 팬들의 요구도 벌써부터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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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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