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바이든이 보여준 ‘기업 사용 설명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바이든 대통령이 삼성전자·현대차·SK·LG 등 4대 그룹 대표를 일일이 호명하며 “땡큐”를 연발한 장면이야말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백미다. 문재인 정부 내내 적폐로 몰리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기업이 타국땅에서, 국내에선 상상도 못 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정부 여당이 “건국 이래 최대 성과”라며 자화자찬하는 정상 외교의 성공을 수면 아래서 떠받친 건 기업들이었다. 기업이 정권의 체면을 살리고 국익을 지켰다.

44조원 대미 투자 결정 4대 그룹 #‘기업이 일자리 만든다’ 확인케해 #‘일자리 정부’ 말뿐 고용절벽 참담 #반기업 규제·족쇄 풀어야 해결돼

미·중 패권 경쟁으로 촉발된 국제 질서의 거대한 지각변동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풍경이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바이오·전기차·배터리 같은 첨단 기술의 공급망을 미국 주도로 재편해 중국으로의 기술 이전과 확장을 막고 밸류 체인을 강화하는 전략 프로그램에 시동을 걸었다. 특히 지난 4년 트럼프의 공화당에 정권을 내준 뼈아픈 기억이 생생한 민주당 정권으로선 국내에 일자리를 만드는 제조업 부활 프로젝트에 정권의 명운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 창출은 미국 정치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자 최고의 선이다. 그러자니 첨단 제조 능력을 갖춘 한국 기업과의 콜라보가 절실했다.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 미사일 지침 폐지, 우주 탐사·항공 파트너십 강화 등, 문 대통령이 귀국길에 들고 온 선물 꾸러미엔 대한민국 대표 기업들의 44조원 투자 협력에 대한 답례품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초일류 기업들과 전략 파트너십을 맺게 됨으로써 세계 최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티켓을 갖게 된 건 박수칠 일이다. 그러나 시선을 국내로 돌릴수록 암울함을 떨치기 힘들다. “한국 기업들의 투자로 수천개의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한 바이든 대통령과 갑갑한 우리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돼서다. 100장의 이력서를 쓰고도 일자리 얻기는 언감생심, 배달 음식과 쓰다만 자기소개서를 남긴 채 원룸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청춘, 청년 4명 중 1명이 실업자이고, 구직을 단념한 채 ‘그냥 쉰다’는 실업자가 270만명(2월14일 기준)을 넘어선 나라. 일자리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가 빚어낸 F학점의 고용 성적표다.

역대급 실업률이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때문이라는 정부의 변명과 달리, 한국은행은 지난해 실업률(4.0%)은 ▶노동집약 부문의 해외 이전 ▶정부의 직접 고용정책 강화 ▶경직적 노동시장 구조가 주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일자리 만들 기업들은 자꾸 해외로 빠져나가고, 잔류 기업들은 강성 노조와 노동 규제 때문에 신규 채용을 꺼리고 있다는 얘기다. ‘고용 절벽’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정부의 뒤죽박죽 정책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다. 일자리 상황판을 내걸며 벌이는 쇼에만 능숙할 뿐, 지난 4년 내내 기업규제 3법과 같은 반기업 정책과 규제를 남발하며 족쇄를 채우고, 툭하면 회초리를 휘둘러왔다.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반도체 공장 송전선 공사를 5년동안 중단했던 삼성전자는 최근에야 수천억 원의 공사비를 자부담하는 조건으로 겨우 지중화(地中化)에 타결했다. 주 정부들이 우리쪽을 상대로 거액의 세금 감면 조건을 내걸고 공장 유치 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대비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기업하기 참 나쁜 나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환경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리 없다. 미국 컨설팅업체 AT Kearney에 따르면 미국의 리쇼어링(reshoring, 해외로 나간 기업이 국내로 되돌아오는 것) 지수는 2016년 -13에서 2019년 +98로 수직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한국은 -16에서 -37로 악화됐다. 미국은 유턴 기업이 늘어났지만 한국은 되레 더 많은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대기업의 경우 미국의 포드·GM·월풀 등이, 일본은 샤프·캐논·혼다 등이 리쇼어링해 국내 투자와 고용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한국은 2019년 현대모비스가 돌아온 게 유일한 리쇼어링 사례다. (문종철,‘국내 리쇼어링 정책의 문제점과 개선을 위한 제언’)

문 대통령이 어제 4대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했다. 대미 투자 결정과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기업이 협력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투자가 한국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기업이 나가면 중소·중견 협력업체들도 동반해 미국에 진출하게 되니 부품·소재·장비 수출이 늘어 국내 일자리가 더 창출이 많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꼭 듣고 싶은 핵심을 간과한 건 아닐까. ‘기업 활동을 옥죄는 반기업적 규제와 족쇄를 풀어 맘 놓고 기업 할 수 있도록 남은 임기동안 노력하겠다. 그러니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달라.’ 기업들은 내심 이런 전향적인 메시지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모처럼 마련된 화기애애한 자리, 대한민국 대표 기업 총수들과 대통령의 만남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바이든 대통령이 살짝 꺼내 보여준 ‘기업 사용 설명서’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이정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