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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책·브레이브걸스·복학왕…이대남 심리를 읽는 문화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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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문화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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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욱(28·회사원)씨가 요즘 가장 열심히 챙겨보는 콘텐트는 ‘머니게임’이다.

주식책 탐독하며 바닥 탈출의 꿈 #복학왕 보며 부동산 정책 비판 #걸크러시와 딴판인 브브걸에 환호 #20대 남성 속내는 좌절·분노·허탈

동명 웹툰을 모티브로 한 이 유튜브 방송은 상금(4억8000만원)을 놓고 물도 나오지 않고, 수세식 양변기도 없는 밀폐 공간에서 14일 동안 버티는 것이 규칙이다. 참가자 8명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최종 1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면서 말 그대로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평균 조회 수는 700만 건. 전씨는 “그럴싸한 집을 찾아 꾸미고, 캠핑 다니는 방송들은 이제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며 “폭락한 코인 계좌로 얻는 스트레스를 그나마 ‘머니게임’을 보며 달랜다. 나도 저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생각하곤 한다”고 말했다.

좌절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 ‘이대남’으로 불리는 20대 남성의 심리적 특징을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입을 위해 노력했고 병역이라는 의무를 수행했지만, 사회에서 돌아오는 변변한 ‘보상’이 없고, 일부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에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당한다. 심지어 집값은 폭등하고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상적 근로로는 불가능하다는 좌절과 분노가 분출하는 중”이라고 봤다. 애초에는 ‘이대남’그룹이 정치적 요인에서 생겨났지만, 이제는 ‘이준석 현상’과 GS25 ‘남혐’ 논란 등으로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뚜렷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좌절은 독서 패턴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교보문고가 2021년 1월~5월까지 조사한 연령대별 도서 판매 추이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다소 다르다. 20~34세 여성의 경우 가장 많이 읽은 책 1~10위에서 1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비롯해 5편이 문학 작품이다. 반면 같은 연령대의 남성은 1위  『주린이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77』  등 경제경영 분야가 7권으로 가장 많다.  『주식투자 무작정 따라하기』,  『돈의 속성』  등 투자 관련 서적들이다.

인기 웹툰 기안84의 ‘복학왕’을 둘러싼 각종 현상도 최근 상황을 잘 보여준다. 지방대를 나온 20대 남성(우기명)이 사회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그린 이 웹툰은 지난해부터 문재인 정부의 주택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젊은 세대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반면 여성을 사회에서 능력보다는 외모나 성적 매력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묘사했다는 논란이 제기되며 반발을 샀다. 이후 ‘복학왕’의 게시판은 이를 둘러싼 찬반 대결장으로 비화한 상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복학왕’에 대한 ‘별점 테러’(별점을 낮게 매기는 행위)가 진행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이두나’ ‘성경의 역사’ 등 여성 중심 서사 웹툰에 보복 성격의 별점 테러가 빈번해졌다. 90년대생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풀어낸  『K-를 생각한다』 의 저자 임명묵 칼럼니스트는 “일종의 ‘미러링’(보복적 모방행위) 현상이랄 수 있다. ‘이제 너희도 한번 겪어봐라’는 심리”라며 “과거에는 오프라인 중심사회이니 남성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했지만 온라인 익명성 문화가 보편화하고 SNS 사용에 익숙해지면서 남성들도 마음속 깊이 덮어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고 말했다.

초고속 통신망의 보급에 따른 게임 문화가 남성들이 집단의 목소리를 내는 데 한몫했다는 시각도 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팀플’(팀 플레이)이라는 협력으로 ‘화력’을 집중하고, ‘미션’(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의 게임 문화에 어려서부터 익숙한 만큼 온라인에서의 집단행동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홍난지 청강산업대 교수는 “남성들의 별점 테러는 최근 불거진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과거 여성보다 ‘팬덤’이 약하다는 관념도 달라졌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여성의 자아나 주체성을 강조하는 걸그룹들이 여성 팬 지지 속에 급속히 성장했고, ‘센 여성’을 강조하는 ‘걸크러시’ 계열이 시장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반면 올해 초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은 이런 흐름을 거스른다. 브레이브걸스는 섹시하고 발랄한 분위기로 남심에 호소하는 스타일. 최근 가요계에선 외면받았던 부류다. 군부대 위문공연 등으로 인지도를 쌓았는데, 최근 군인들의 휴대전화 허용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요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20대 남성이 과거보다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준석-진중권’ 논쟁에서 드러났듯 ‘이대남’ 이슈가 지나치게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쪽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대남’이라는 단어 자체가 진정한 양성평등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대 남성들이 갖는 불만이 분명 존재하지만, 이제는 사회적 논의를 통해 이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도 “자꾸만 두 사람이 ‘내가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식으로 주고받는 논쟁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며 “그동안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는 20대 남녀의 이야기를 한 번 직접 들어보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인과 언론에서도 책임을 느끼고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사회적 타협을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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