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송현동 땅, 이건희 회장이 미술관 부지로 매입했던 곳"

중앙일보

입력 2021.06.03 00:02

업데이트 2021.06.0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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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컬렉터 이건희’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의 회고<하>

1996년 로댕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당시 로댕미술관장 자크 빌랭. [사진 이호재]

1996년 로댕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당시 로댕미술관장 자크 빌랭. [사진 이호재]

‘소장 가치가 있으면 가격을 따지지 않는다’‘이전 소장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준다’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미술품 수집 원칙이다. 컬렉션 과정을 20여년 지켜본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 이호재씨는 “민화연구의 선각자 조자용(1926~2000) 박사로부터 ‘까치호랑이’를 사들인 일화도 특별하다”고 전했다.

1997년 미술관 등 염두에 두고 매입
이 회장 “여기 건물 앉힐까” 구상
미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 설계 맡겨

임옥상 등 민중미술 작가에도 관심
전시회 열어주고 직접 작품 사들여

로댕 ‘지옥의 문’ 한국 구입 어렵자
이 회장, 프랑스 날아가 관철시켜

왜 까치호랑이인가,
“역사성이 있고 자료가 될 작품을 찾다 88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델이 된 까치호랑이 민화 구입을 추진했다. 3000만원을 드리려 하니 조 박사가 펄쩍 뛰며 ‘과하다. 1000만원만 받겠다’고 했다. 이를 전해 들은 회장께선 ‘민화 해외 순회전 하시느라 고생하셨다. 1억원을 드리라’며 주셨고, 조 박사는 다시 일부를 떼어 돌려주셨다. 극구 거절하자 추사목각현판 등 다른 작품까지 내주셨다.”

국립현대미술관 기증품 중 ‘황소’는 당시 이중섭 작품의 시중가(300~500만원)의 10배 넘는 가격(3800만원)을 주고도 기꺼이 사들였다.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는 그림의 존재를 보고받은 자리에서 구매를 결정했다.

"삼성 임원 사무실에 그림 한 두점은 있어야"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들 집무실에 걸기 위해 제작 주문했던 유영국 무제, 동판화 [사진 이호재]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들 집무실에 걸기 위해 제작 주문했던 유영국 무제, 동판화 [사진 이호재]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들 집무실에 걸라"며 제작 주문한 김창열 ''회귀' 동판화. [사진 이호재]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들 집무실에 걸라"며 제작 주문한 김창열 ''회귀' 동판화. [사진 이호재]

기증품에 유영국 작품이 187점이나 되고 이중 판화가 167점인데.

“1990년대 중반 이 회장께서 삼성 임원이라면 사무실에 원화 한 점, 판화 두 점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이종상·이우환·박서보·유영국·김창열 작품의 동판화를 주문했다. 작가별로 동판화 1~4종(에디션 55까지)을 만들었는데 그중 유 작가 동판화를 좋아하셔서 많이 제작했다.”

이씨는 “이 회장의 집무실·접견실은 작은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고 회고했다. “벽면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 심산 노수현의 산수화가 4점 있었고, 나중엔 이종상 화백 그림으로 바뀌기도 했다. 조선 목기 옆엔 샤갈 그림이 있었다. 늘 작품을 가까이 두신 분이다.”

민중 미술 작가들 작품도 꽤 있다.
“1980년대 호암갤러리를 열고 젊은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전시하라고 했다. 그 덕에 당시 박대성, 임옥상 같은 작가가 큰 주목을 받았다. 임옥상이 누군가.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진보 미술 진영에 있던 신학철 작가의 ‘한국 현대사-종합’ 연작 일부도 샀는데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더라.”

이씨는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을 들여온 과정도 전했다. 당시 12개 에디션 중 단 한 점 남았는데, 프랑스 정부가 한국에 보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 이씨가 “어렵다”고 보고하자 이 회장은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느냐” 며 직접 프랑스로 가 담판 짓고 작품을 들여왔다. 이씨는 “보통 컬렉터들은 화상이 가져온 걸 보고 사거나 안 사거나 결정하면 그만이다. 협상이 어렵다는 말에 직접 나서는 컬렉터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송현동에 미술관 지으려 프랭크 게리에 설계 의뢰까지"

이건희 회장이 직접 프랑스까지 찾아가 협상해 한국으로 들여온 로댕의 '지옥의 문'. [중앙포토]

이건희 회장이 직접 프랑스까지 찾아가 협상해 한국으로 들여온 로댕의 '지옥의 문'. [중앙포토]

지금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국립근대미술관 건립과 이건희 미술관 건립 이슈를 혼동해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국립근대미술관은 반드시 설립돼야 하지만 ‘이건희 미술관’은 전혀 별개 문제다. 컬렉션은 수집한 사람의 삶과 역사관, 안목, 취향까지 담아낸다. 한 사람이 자신만의 안목으로 모은 컬렉션은 한자리에 모으는 게 맞다.”

그는 미술관 후보지 중 하나인 서울 송현동 땅에 대해서도 꼭 하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그 부지(3만6600㎡, 약 1만평)야말로 이 회장이 1997년 미술관, 오페라하우스 등 건립을 염두에 두고 매입한 곳”이라면서다. “당시 제가 인사동보존회장이었는데, 그곳이 매물로 나왔고 모 건설사가 빌라 400채를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회장께 이를 전하자 부부가 직접 그곳을 찾았고 ‘경복궁과 창덕궁, 청와대로 둘러싸인 이 자리에 빌라촌은 아니다’며 부지를 꼭 사라고 하셨다. 이후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설계까지 맡겼었다.”

매입한 땅은 잔금을 다 치르기 전 외환위기가 닥치고, 대한항공 소유로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씨는 “당시 이 회장께서 부지 이곳저곳을 보며 ‘여기에 건물을 앉히면 어떨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며 “기증된 컬렉션으로 이곳에 미술관이 지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이건희 미술관' 건립 부지로 거론되고 있는 서울 송현동 일대. [뉴스1]

현재 '이건희 미술관' 건립 부지로 거론되고 있는 서울 송현동 일대. [뉴스1]

‘이건희 컬렉션’은 공공 자산이 됐다.
“작품 하나하나가 가치 있고 스토리가 있음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그게 기증자에 대한 예우다. 그분이 실현하려던 뜻을 국가가 잘 헤아리고 마무리해주길 바란다. 현재까지 기증품에 지정문화재 60점이 있는데, 고려불화 등 앞으로 국보·보물로 지정될 것들이 그 이상 포함돼 있다. 이 컬렉션의 미술사적 가치를 잘 연구하고 정리했으면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내 인생에서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행운 중 행운이었다. 작품을 수집하는 태도, 이전 소장자들까지 배려하고 예우하는 모습 등은 제겐 가장 큰 공부였다”고 했다. 이어 “돈 많은 이건희가 아니라 ‘프로 컬렉터’로서 그가 한국 미술계에 기여한 내용이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이호재=1983년 가나화랑 설립, 1998년 가나아트센터 개관, 서울옥션 설립, 인2001년 인사아트센터 개관, 2000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훈, 2017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 수상. 현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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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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