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휴대전화 착신 0통…죽음과 맞바꾼 만화 '베르세르크'

중앙일보

입력 2021.06.02 21:43

업데이트 2021.06.02 21:54

한동안 관심에서 멀어졌던 만화 '베르세르크'를 최근 다시 읽기 시작한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연재 30년이 넘은 이 만화가 새삼 한국과 일본에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베르세르크'를 그린 일본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三浦建太郎)가 지난달 6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지난달 20일 트위터를 통해 소식을 알린 출판사에 따르면 사인은 '급성 대동맥박리'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부고였습니다.

[도쿄B화]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 별세
"만화 외엔 아무 것도 없는 내 인생"

만화 '베르세르크' 1권 표지그림. [하쿠센샤 제공=연합뉴스]

만화 '베르세르크' 1권 표지그림. [하쿠센샤 제공=연합뉴스]

미우라 작가는 대학 졸업 후인 1985년 만화 '다시'로 데뷔했고, 1989년부터는 다크 판타지 만화인 '베르세르크'를 지금까지 32년간 그려왔습니다. 단행본으로는 40권까지 나와 5000만부가 넘게 팔린 작품이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의 결말은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베르세르크'의 줄거리를 짧게 소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이 만화를 처음 봤을 때 엄청난 스케일과 과격한 묘사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입은 갑옷의 짙고 흐린 음영까지, 배경 나무의 잎맥 하나까지 세밀화처럼 촘촘히 묘사된 그림에 '이런 걸 그려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2년간 휴대전화 착신은 0통"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일본 SNS에 독자들이 애도의 뜻으로 올린 글들을 읽다 보니 '역시나' 싶었습니다. 미우라 작가는 인터뷰를 하거나 TV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로지 만화로만 이야기하는 비밀스러운 작가였죠. 아니 그보다 작품 이외의 활동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우라 켄타로 작가. [사진 IMDB]

미우라 켄타로 작가. [사진 IMDB]

일본 만화잡지에는 작가들이 쓰는 짧은 연재 후기가 실리곤 합니다. '베르세르크' 잡지판에 실렸던 후기들을 모아놓으니 만화에 '영혼을 갈아 넣은' 그의 삶이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올해 이틀밖에 쉬지 않았다"고 적었고, "평균 수면시간이 4시간을 밑돈다"고도 했습니다.

웃프고 자조적인 멘트는 이어집니다.

"한 달 반 만에 외출했다가 일사병에 당했다!!'(1995년) 

"신년회를 위해 옷과 신발을 샀다. 운동화 2켤레밖에 없어요."(1996년)

"2년간 휴대전화 착신이 제로(0). 해지해야겠어. 빈곤한 인간관계가 나를 책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2002년)

"30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만화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일그러진 인생이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이대로 고(GO)!"(2006년)

"휴재하는 동안에도 계속 군인을 그리고 있었습니다."(2007년)

그는 어시스턴트의 손을 빌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과정을 혼자 해냈다고 합니다. 완벽주의자였던 거죠. 2015년부터는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디테일 병'이 심해졌다고도 했습니다. 디지털 그림은 끊임없이 확대가 가능해 확대에 확대를 거듭해야 보이는 작은 점 하나에까지 신경 쓰게 됐다는 겁니다. 그를 담당하는 편집자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선생님, 그만 하세요"였다고 하네요.

"만화가에도 잠은 중요하다" 

홀로 집에 틀어박혀 초콜릿과 '칼로리메이트'로 끼니를 때우는 일상에 몸은 망가져 갔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수차례 '휴재-재연재'를 반복했죠.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 트위터에서는 '만화가의 단명(短命)'과 관련한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출판사 하쿠센샤가 트위터에 올린 베르세르크 작가의 부고. [트위터 캡처]

출판사 하쿠센샤가 트위터에 올린 베르세르크 작가의 부고. [트위터 캡처]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철완 아톰' '붓다')와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 '가면라이더' '파워레인저') 등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들은 모두 60세 전후의 이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죠. 이들은 모두 만화를 그리느라 며칠씩 밤을 새우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반면 이들과 동년배였던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게게게의 기타로') 작가는 "어떤 경우라도 8시간은 자야 한다"면서 만화가 친구들에게 잠을 권유했다고 하는데요. 그는 지난 2015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즐거우니까 계속 그린다"

'장인정신의 끝판왕'으로 걸작을 남긴 예술가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선 안타깝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미우라 작가가 2019년 만화사이트 '코믹 나탈리'와 한 인터뷰를 읽게 됩니다.

1989년부터 '베르세르크'를 그렸는 데 질리지 않으세요?
"질리지 않아요. 매회 새로운 걸 그린다는 기분으로 하고 있으니까요.(후략)"
괴로운 점은 없습니까.
"만화를 그리는 것은 사실 전부 즐거워요. 만화를 그려서 괴로운 일은 거의 없네요. 귀찮은 건 있지만, 그 귀찮은 것도 즐거우니 하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오래 할 수 없죠. 즐거우니까 하루종일 만화만 그리느라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점은 있죠. 시간이 없네, 살 날이 줄어들고 있네, 체력이 떨어지네, 라는 느낌이 괴롭다고 할까요." 

좋아하는 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어 수많은 독자를 감동시킨 세계를 만들어낸 삶이었습니다. '베르세르크' 주인공 '가츠'가 사도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소녀에게 하는 이 명대사가 작가와 만화의 '진검승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없는 거야.(逃げ出した先に楽園なんてありゃしねえのさ)"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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