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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병원 치료 때려치고 귀가해 아이스크림 먹은 시한부 어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94)

요즘은 지인들에게 가끔 몰아서 ‘손 흔드는 이모티콘’으로 안부를 전한다. 코로나로 말하기도 귀찮은 우울한 세상이다. 내 주위를 보면 형편이 괜찮아도 ‘정년퇴직한 남편과 함께, 많이 공부시킨 자식의 능력이 아까워 자진해서 봐주는 손자와 함께, 아직 집을 못 나간 제비 새끼 같은 자식과 함께’라는 우울 세트에 갇혀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지인이 많다.

나 역시 월급이 삭감되어 백만 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지만 ‘함께’라는 3종 세트가 없는지라 마음 힘듦이 조금 덜 하다. 자칭 ‘부자만 아닌 거지 내가 가장 잘나가~’ 떵떵거리며 죽겠다는 지인을 가끔 불러내 위로 밥을 산다.

며칠 전엔 지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모임 예약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식당을 하는 지인에겐 밥 먹으러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라 생각한다.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다. 그는 2년째 이어지는 요즘의 고비가 너무 힘들다. 마음이 너무 쳐져 죽을 궁리를 하던 중이었단다. 여러 가지 죽는 방법을 이야기하며 우스개 한다. 농담이라도 사뭇 진지한 목소리가 마음 아프다.

어느 영화에서 시한부를 선고 받은 주인공은 치료를 받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사진 pxhere]

어느 영화에서 시한부를 선고 받은 주인공은 치료를 받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사진 pxhere]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덩달아 싱숭생숭하고 오래전 본 영화도 생각났다. 그 영화속에서 1년을 살 수 있다는 병원의 말이 무색하게 주인공은 억지로 십년을 더 산다. 여기서 ‘억지로’는 ‘내 마음에 상관없이’란 뜻인데, 오래 사는 것이 내 탓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선 자식들이 만들어 놓은 덫이다. 자기네들 필요에 의해, 남의 이목에, 재산 이전에, 마음 정리가 안 된 자식들의 욕심으로 우리는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또 한 영화, 시한부 어른에게 담당 의사는 두 가지 남은 생을 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첨단 의학에 몸을 맡기고 치료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하나는 집에 가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주인공은 자식들의 치료 권유를 뿌리치고 후자를 택한다. 집에 돌아가서 먹으면 안 좋다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안 죽고 오래 산다. 이 또한 살아있는 남은 날들을 보람 있게 보내지 못하고 죽음만 생각하다가 아까운 시간을 보낸다. 두 영화는 뒤늦은 인생을 삶의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고 경험도 없는 죽음만 생각하다가 허송세월하는데, 내 삶의 시간을 돌아보게 해 준다.

흰 종이에 점 하나 찍힌 시험문제에 대한 교수의 해답이 마음을 감동시키며 카톡으로 전해진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날들, 건강한 몸 등 너무 많은 여백의 시간은 외면하고 작은 점 하나에 온통 골몰하고 찝찝해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닐는지 묻는다. 작은 점 하나는 슬픔, 불안, 아픔, 우울 등 인간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상처라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어느 철학가의 묘비명처럼 경험 없는 죽음보다는 살아있는 날을 경험으로 만들면 좋겠다. 나에게도 몇 번이나 찾아온 앞이 보이지 않던 아픔과 재난은 ‘반전을 만들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반전의 경험이 많을수록 능력도 쌓였다.

만화책에서 읽은 죽은 자와 저승사자의 대화가 감명 깊어 옮겨본다.

저승사자는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에게 "죽어버리면 기회는 없어요. 삶은 단 한 번뿐이에요. 반전은 숨을 쉬고 있을 때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pixabay]

저승사자는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에게 "죽어버리면 기회는 없어요. 삶은 단 한 번뿐이에요. 반전은 숨을 쉬고 있을 때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pixabay]

한 사람이 자살하여 저승에 갔다. 저승사자는 그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을 하고 이제 곧 먼지같이 소멸될 것이라 말해주었다.

“별일 아닙니다. 하루에 30만 명 정도가 죽고 그만큼 태어납니다.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거, 죽음은 그리 멀지 않고 어렵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그냥 우리 곁에 있습니다. 부정적, 긍정적을 떠나 현실 속에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냥 주어진 일상에 애쓰며 잘살다가 그때가 되어 오면 되는 거지요.”

“명심할게요.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다시 한번….”

“네? 어떻게 되다니요. 이미 어떻게 되었잖아요. 죽어버리면 기회는 없어요. 삶은 단 한 번뿐이에요. 반전을 기대하시나요? 반전은 숨을 쉬고 있을 때만 되는 건데….”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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