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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세계 최강 경제동맹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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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영화 '국제시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기 위해 덕수(가운데·황정민 분)와 달구(왼쪽·오달수 분)가 함보른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영화 '국제시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기 위해 덕수(가운데·황정민 분)와 달구(왼쪽·오달수 분)가 함보른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중앙포토]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함보른 탄광이 떠올랐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루르 지역 함보른 광산을 찾아 이렇게 연설했다. “여러분, 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 자손들에게는 이런 불행을 겪게 하지 맙시다. 잘사는 나라를 남겨 줍시다.” 강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박 대통령도 목이 메어 연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서독에 근로자 2만여 명을 보냈다. 이른바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다. 첫 모집에 나서자 지원자는 인산인해였다. 2400만 인구에 실업자 250만 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광부들은 땅속에서 비지땀을 흘렸고, 간호사들은 험한 일을 도맡았다.

미국에 절실한 한국의 경쟁력은 #근래 국내서 푸대접 받는 제조업 #제조업의 기적은 계속돼야 한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정부의 배려로 도쿄에서 출발한 민항기를 타고 7곳을 거쳐 서독에 도착했다. 국민 대다수가 끼니도 해결하지 못했고 변변한 공장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런 나라에 차관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 결국 이들의 헌신으로 극심한 외화 갈증을 풀어야 했다. 한강의 기적은 이 함보른 탄광의 눈물을 거쳐 시작됐다.
 그로부터 57년 세월이 지나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 기업이 44조원을 투자하면서 미국과 경제동맹을 맺는 자리에 섰다. 문 대통령은 “최고의 순방이고 최고의 회담”이라고 자평을 아끼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함께 대단한 일을 하자”면서 역시 극도의 만족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번 정상회담의 실질적인 주역이 누구인지도 감추지 않았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SK 등 4대 기업 대표를 일으켜세워 “생큐”를 세 번이나 연발했다. 중언부언하면서까지 이런 극찬이 또 있을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국의 투자 기업을 일일이 호명해 감사 표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한국의 투자 기업을 일일이 호명해 감사 표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왜 이들 기업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을까. 그 비밀은 한국의 제조업 생산 능력에 있다. 반도체·배터리·전기차가 모두 첨단기술이라 해도 그 근간은 제조업이다. 미국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지향하면서 반도체·배터리는 물론이고 원전 시공 능력도 크게 상실했다.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면서 외부의 힘을 빌려 생산 능력 복구에 나섰다. 미국이 환대하는 한국 제조업의 국내 현실은 어떤가. 삼성전자는 평택공장 송전선 설치를 위해 5년을 허비한 끝에 4000억원에 가까운 비용을 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기업의 경영진은 국정 농단에 휘말려 4년이 넘도록 수사를 받고 있다. 그 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중소기업은 상황이 더 어렵다. 마침 지난달 25일 복합소재 전문 기업인 한국카본 대전사무소 개소식을 통해 한국 제조업의 극한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이 기업은 한·미 정상회담에 크게 고무돼 있다.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를 계기로 방위산업 진출을 가속하게 되면서다. 개소식에는 한화·LIG 등 방산 관련 기업부터 국방과학연구소와 방위사업청의 전·현직 방산 전문가, KAIST 교수 등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소부장 사업 확대에 기대를 걸고 있는 복합소재 중견기업 한국카본은 최근 관련 업체와 연구소가 집적된 대전에 사무소를 냈다. 복합소재는 선박, 미사일, 우주항공업의 핵심 소재로 쓰인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소부장 사업 확대에 기대를 걸고 있는 복합소재 중견기업 한국카본은 최근 관련 업체와 연구소가 집적된 대전에 사무소를 냈다. 복합소재는 선박, 미사일, 우주항공업의 핵심 소재로 쓰인다.

 이 회사 조문수 회장이 “경제적 의미가 있다”고 해서 취재에 나섰는데, 그의 말 그대로 한·미 정상회담은 제조업에 즉각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미사일이든, 우주항공이든 소재부터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이 소부장 수출 제한을 시도하면서 우리는 그 절실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카본은 경남 밀양에 공장 증설을 포기해야 했다. 아무리 애써도 공업용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북 보은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 중국의 저가 공세 때문에 베트남에도 공장을 지었다. 이것이 한국 제조업의 민낯이다. 그런데도 세계 최강 경제동맹의 원동력이라니 기적 아닌가. 이제라도 제조업의 고충을 들어주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제조업이 대한민국의 기둥이다.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