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은의 야·생·화] 가족·은퇴경기 챙기는 KBO의 선진화

중앙일보

입력 2021.06.01 16:00

업데이트 2021.06.01 16:34

경조사 휴가로 첫 딸을 품에 안은 뒤 맹활약한 LG 채은성 [연합뉴스]

경조사 휴가로 첫 딸을 품에 안은 뒤 맹활약한 LG 채은성 [연합뉴스]

[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몇 년 전 한 퀴즈 예능 프로그램에 '세종대왕이 세계 최초로 도입한 제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답은 '남편의 출산 휴가'였다. 세종대왕은 종전 7일이던 관노비들의 출산 휴가를 산전 30일, 산후 100일로 늘려 사망률을 현저히 줄였다고 한다. 또 "아내의 몸조리 때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남편에게도 30일간 산후 출산 휴가를 줬다.

세종대왕은 조선 시대에 이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반면 야구계는 몇 년 전까지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 있었다. 프로야구 감독, 코치, 선수가 시즌 중 가정사로 경기장을 비우는 것을 '직무 유기'로 여겼다. 아이 셋을 둔 베테랑 선수는 "아내가 출산할 때 한 번도 곁에 있어 본 적이 없다"고 귀띔했다.

변화가 생긴 건 2019년부터다. 프로야구 출범 38년 만에 '경조사 휴가'가 도입됐다. 선수가 직계 가족 사망 또는 자녀 출생을 사유로 5일의 경조 휴가를 신청할 수 있는 제도다. 경조 휴가자는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 열흘이 지나지 않아도 원하는 때 복귀할 수 있다. 휴가 기간도 1군 등록 일수로 인정받는다. 일종의 '유급 휴가'다. 그 덕에 누군가는 갓 태어난 아들을 곧바로 품에 안았고, 누군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첫 시즌에는 안치홍(롯데 자이언츠·당시 KIA 타이거즈), 강민호(삼성 라이온즈) 등 4명이 수혜자였다. 지난 시즌엔 최정(SSG 랜더스), 허경민(두산 베어스) 등 10명이 휴가를 내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올 시즌에도 김재호(두산)와 채은성(LG 트윈스)이 경조 휴가를 썼다. 채은성은 제도 도입 후 유일하게 두 차례 경조 휴가를 사용한 선수다. 2019년 9월엔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달랬고, 올해는 첫 딸을 얻은 기쁨을 누렸다. 채은성은 딸의 출산을 보고 복귀한 지난달 28일, 팀 승리의 주역이 됐다.

메이저리그(MLB)는 한국보다 9년 앞선 2011년부터 비슷한 제도를 운용했다. 롯데 이대호도 MLB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던 2016년 아들이 태어나 출산 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2013년 6월 두 경기를 감독 대행 체제로 치렀는데, 감독과 수석코치가 나란히 자녀의 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워서였다.

일본 프로야구는 반대였다. 일본 야구의 거물인 호시노 센이치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은 1997년 부인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구단에 알리지 않은 채 경기에 나섰다. 2003시즌 막바지엔 모친상을 당하고도 역시 "팀 우승이 먼저"라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 언론과 팬들은 그런 그에게 "남자답다"며 찬사를 보냈다.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로 마지막 한 경기에 더 나설 수 있게 된 김태균 [연합뉴스]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로 마지막 한 경기에 더 나설 수 있게 된 김태균 [연합뉴스]

KBO리그는 과거 MLB보다 일본 야구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점점 그 사이에서 'KBO식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 고리타분한 악습은 버리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는 데 집중한다. 올해 도입된 '은퇴 경기 특별 엔트리'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은퇴 경기를 치르는 선수가 다른 누군가를 2군으로 보내지 않고도 단 하루 1군 엔트리에 초과 등록할 수 있는 규정이다.

지난해 은퇴한 김태균(한화 이글스)이 새 제도의 첫 수혜자였다. 그는 지난달 29일 대전 SSG전에 앞서 모처럼 한화 유니폼을 입고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달려나가 익숙한 1루 앞에 섰다. 정든 고향팀을 떠나게 된 김태균과 그를 떠나보낸 한화 팬 모두에게 또 하나 의미 있는 추억이 남았다.

앞으로도 많은 레전드 스타가 그라운드를 떠날 거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선수'로서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갈수록 유연해지고 있는 KBO리그의 선진화가 반갑다.

배영은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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