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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지식인이 수치심을 처리하는 방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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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지식인의 신념은 자존의 근거지만 때론 수치심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이를테면 20세기 중반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그랬다. 대략 세 가지 충격이 그들을 수치심과 맞닥뜨리게 했다. 하나는 전후 호황과 사민주의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들이 중산층화하며 더는 혁명을 원하지 않게 된 것. 또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으로 붕괴하긴커녕 더욱 고도화하는 것. 특히 미국 자본주의가 보인 대량소비 체제와 노동자의 의식과 감각을 사로잡은 문화산업은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 개인숭배를 공식 인정하는 한편 헝가리 민주 시위를 무력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박살 난다.

‘포스트 모더니즘’ 잉태한 건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의 수치심 #386 좌파의 도피처·분장도구 역할 #선정주의 정치 소매상들 판쳐

일군의 지식인들은 청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신좌파’를 형성한다. 알튀세르를 필두로 한 ‘포스트 구조주의’ 그룹도 만들어진다.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가 헤겔 사상에 사로잡혀 있다며, ‘인식론적 단절’ 이후, 즉 『자본』으로 대변되는 성숙기 마르크스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가 『자본』의 이론적 핵심인 1권 제1편 ‘상품과 화폐’ 부분까지 “헤겔의 극악한 마지막 흔적”이라 규정해버린 것이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를 도입하여 마르크스 복권을 시도하지만, 치명적 오류로 출발한 사유는 끝없는 혼란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다.

알튀세르 이후 포스트 구조주의 지식인들은 갈수록 역사 진보, 이념, 계급 같은 거대담론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푸코는 아예 사회를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기존 마르크스주의가 거대담론에 경도되어 많은 폐해를 낳은 건 분명이다. 그러나 그걸 넘어서는 방법은 거대담론과 미시 담론의 조화이지, 거대담론 부정이나 미시 담론 경도는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삶과 사회는 거대 차원(계급과 역사 진보 등)과 미시 차원(정체성과 일상 등)을 동시에 가진다.

그들이 어이없는 역편향에 빠진 건 그들이 생산과 노동이 이루어지는 실제 현실이 아니라 책과 연구실로 축조된 관념 세계에서 살아가는 먹물이어서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사유가 수치심으로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한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은 수치심을 비판적 성찰과 지적 전투로 극복하는 게 아니라, 자기 부정으로 회피하고 지적 혼란을 위한 지적 혼란으로 도주한다. 혼란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 서구 지식인 일반에 생겨난 근대에 대한 회의와 결합하며, 결국 ‘업데이트된 반공주의’로서 소임을 수행하게 된다.

사상의 자유가 만개한 20세기 중반 서유럽 사회에서 금지와 탄압에 기반을 둔 전통적 반공주의는 불가능했다. 시스템의 곤란을 상상해본다면, 이제 반공주의의 남은 형태는 금지와 탄압이 아니라 ‘무력화’이다. 그 지식인들은 시스템의 요구에 이상적으로 부응한다. 사회주의를 넘어 그 근본 뿌리로서 근대성 부정하기, 이유 없는 난해함(촘스키가 ‘불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비난한)으로 활동가나 노동자 시민의 접근을 막고, 제도 학술계의 지적 유희로 만들기, 그리고 그런 작업에 성과를 보인 지식인들은 종신 보장 교수직과 지식시장에서 명성과 성공을 보상받아 더 완전히 포박된다.

그들의 사회적 의미와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한 건 다름 아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다. 2011년 파리의 CIA 요원들이 1985년 작성한 보고서가 기밀해제 되어 공개된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전향’이라는 보고서의 결론엔 숙원을 이룬 감격이 생생하다.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등이 가담한, 지금까지 그 무엇보다도 난해하고 기교적이라고 평가받는 구조주의의 흐름은 마침내 마르크스적 전통을 벗어났다.” CIA의 응원 속에 그 사상은 바로 미국에 수입되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브랜드로 재포장되고, 폭발적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

한국에선 80년대에 현실 사회주의에 흠뻑 빠졌다가 그 붕괴로 수치심과 맞닥뜨린 386 좌파들의 도피처이자, 힙한 지식인으로 분장 도구가 된다. 지적 기지촌의 면모를 과시라도 하듯, 지식사회(와 문화예술계)를 휩쓴 포스트모던 놀이는 업데이트된 반공주의로서 소임 또한 매우 훌륭하게 수행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담론이 모조리 구 좌파적인 것이라 치부되는 경박함은, 마침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지식사회의 유의미한 대응이나 견제를 차단하고 오히려 길을 터준다. 한국 지식사회는 사실 그 무렵 파산했다.

한국 지식사회는 여전히 그 참상에 대한 어떤 진지한 성찰도 토론도 없다. 그저 다름없이 ‘신상’ 수입 지식상품을 쫓아다닐 뿐이다. 유시민, 김어준, 진중권 같은 선정주의를 파는 정치 소매상들이 사회 담론을 과잉 점유한 풍경은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애초 포스트모던 상품 수입에 앞장섰던 이진경, 김재인 같은 이들이 ‘진보를 가장한 사익추구세력’을 열심히 옹호하는 무지의 행태 또한 이상할 건 없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