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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위리안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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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해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안치란 거주의 제한을 두는 조선시대 유배형벌이다. 주로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해당했다. 고향에서 지내는 본향안치, 섬에서 지내는 절도안치, 변방에 지내는 극변안치,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싼 집 안에서만 지내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등 종류도 다양하다.

산자의 무덤이라는 위리안치는 가장 중죄인에게 내려졌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외부인 출입도 금지한다. 다른 귀양살이에서는 손님을 맞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제약이 없었던 것에 비하면 꽤 중한 형벌이다.

폭정을 일삼던 폐주 연산군은 1506년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됐으나 두 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도 교동에 위리안치됐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 생을 마감했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윤상도 옥사 사건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돼 8년을 보낸다. 유배 중 주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추사는 아들에게도 독서를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지난해 아무런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작품이다. 옛정을 잊지 않고 어렵게 책을 구해 가져다주는 제자 이상적의 고마움을 세한(歲寒, 겨울에 홀로 푸른 소나무)에 비유한 역작이다.

회고록을 발매한 조국 전 장관이 최근 SNS에 글을 올렸다. 자신을 ‘위리안치의 극수(棘囚)’라고 표현하며 “이 책을 쓴 것은 정치활동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현재의 정치과정에 개입하기 위함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사태를 정확히 기록하고 최소한의 해명과 소명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책 발매 소식이 알려지자 “다섯권 주문했다”, “초판 200쇄쯤 갔으면 좋겠다”는 열렬한 반응이 여권에서 터져 나왔다. 여권 대선주자들도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다”(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가슴이 아리다”(정세균 전 국무총리) 등의 메시지를 쏟아냈다.

재·보궐 선거 패배 직후 조국사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당내에서 흘러나온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갑자기 등장한 회고록과 여권의 반응에 민심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조 전 장관이 정말로 위리안치의 극수와 같은 심정으로 지내왔다면 책을 쓰기보단 추사처럼 독서에 더 매진해야 하지 않았을까? 가시 울타리 속 ‘조국의 시간’은 아무래도 민심과 영 거꾸로만 흘렀던 모양이다.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