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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 과속의 충격' 배심원도 놀랐다…결국 운전자 법정구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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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서울 강남의 9차선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던 보행자를 쳐 사망하게 한 운전자가 국민참여재판에서 금고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갑자기 나타나 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과 재판부 판단은 모두 유죄였다. “반대편 차선의 차량도 없었고, 야간에 비가 내리고 있는 도로에서 과속해 운전했다”는 점에서다.

무단횡단 불구 치사 혐의 만장일치 유죄, 금고 1년

‘비 오는 새벽·무단횡단·과속’ 쟁점된 참여재판

“현장 영상을 보시면 피고인의 차량이 들이받은 후 피해자가 공중에 날아올라 회전하는 횟수, 바닥에 떨어진 충격 등을 보면 속도를 감안하실 수 있을 겁니다.”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형사대법정. 형사21-3부(부장 장용범·마성영·김상연) 심리로 권모씨의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치사) 혐의에 관한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됐다.

8명의 배심원단(1명 예비 배심원) 앞에 선 검사가 유죄의 증거로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를 법정에서 재생했다. 사고 순간이 영상으로 재생되자 빈틈없이 들어선 방청석 한 편에서 “아”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검사는 “피고인이 빗길에서 과속했고, 전방주시 의무도 지키지 않아 피해자가 사망한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은 사건이 일어난 2018년 이후 2년 9개월 만에 열린 공판이었다. 피고인 권씨는 그해 8월 새벽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왕복 9차선 도로에서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가다가, 반대편 차로에서 무단횡단하던 피해자 A씨(당시 34세)를 충격했다. 당시 교차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60㎞. 사건 당일엔 비가 왔다. 병원으로 이송된 A씨는 사망했고, 권씨는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권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이번 사건의 판단은 배심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재판의 주된 쟁점은 권씨의 과속 여부와 ‘피할 수 없는 사고였나’ 여부였다. 검사와 변호인은 8명의 배심원단(여성 5명·남성 3명) 앞에서 도로교통공단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현장 출동 경찰관의 진술보고서 등 증거들을 제시하며 치열하게 주장을 펼쳤다.

우선 권씨 변호인은 “무단횡단 교통사고에 관한 한 일반인의 법 감정과 법관의 법 감정 다르다고 생각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라며 “이번 일은 피고인으로선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은 “피고인은 반대편 차선에서 무단횡단을 하던 피해자가 중앙선을 넘어오기 시작한 직후 위험을 인지했고,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사고를 막기 위한 피고인의 반응 속도는 1초였다”고 밝혔다. 이어 “배심원들이 운전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며 “1초 안에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면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강남대로를 무단횡단하는 한 시민. 이번 사건과 관계 없음. [중앙포토]

서울 서초구 서초동 강남대로를 무단횡단하는 한 시민. 이번 사건과 관계 없음. [중앙포토]

또 “빗길에서 제한속도의 20퍼센트가량을 감속(이 사건에선 48㎞)하도록 한 건 권고사항”이라며 “당시엔 비가 내린 지 세 시간이 지나 피고인이 감속을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반면 검찰 측도 도로교통공단 등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하며 이를 반박했다. “주변 건물의 불빛이 환했고 가로등이 있었던 점,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전혀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피고인의 가시거리는 최대 30미터로 추정된다”며 “피고인이 규정 속도를 지켜 48㎞로 운행했고 전방을 제대로 살폈다면 피해자 앞에 멈춰설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는 내용이다. 도로교통공단ㆍ국과수는 권씨의 차량 속도를 시속 68㎞ 내지 72㎞로 추정했다.

검사는 또 “피해자는 뛰거나 급히 오지 않고 걸어서 건너고 있었다”며 “권씨의 차량 선팅이 법정 기준 이상으로 짙게 돼 있었고, 피해자 쪽 전조등이 나가 있었던 점도 운전자의 과실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보다 형량 높인 배심원들 "금고 1년 6개월 이상"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7명의 배심원은 모두 권씨 잘못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예비 배심원은 평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9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유·무죄와 양형에 관한 배심원단의 토론이 이어지며 선고는 오후 9시 50분께 이뤄졌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평결 결과는 만장일치 유죄이며, 재판부도 증거를 종합할 때 공소사실이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단한다”며 권씨에게 금고 1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또 “야간에 비가 내리고 있어 젖은 도로에서 운전석이 짙게 선팅돼 있고, 왼쪽 전조등도 작동하지 않아 안전운행에 지장이 있는 승용차를 제한속도를 시속 20㎞ 초과해 운행하면서, 전방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과실이 있어 그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설명했다.

특히 권씨의 양형에 대해 재판부보다 배심원단 판단이 더 무거웠다. 금고 1년 6개월(5명), 금고 2년(2명) 등으로 실제 선고보다 위중했다. 국민참여재판의 평결은 권고 사항이어서 재판부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정에서 결과를 지켜보던 유가족은 권씨에게 실형이 선고되자 눈물을 터뜨렸다.

"한 사람 운명 달려" "유족 분노" 검찰 대 변호인의 호소 전략

이날 국민참여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법정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20대 여성부터 머리가 희끗한 남성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들이 마스크를 낀 채 방청했다. 이에 따라 검사와 변호인 양측은 ‘공감 전략’도 썼다.

변론에 앞서 변호인은 “가족을 잃으신 유가족에게 피고인의 마음을 담아 깊은 사과와 애도를 전한다”며 운을 뗐다. 배심원들을 향해선 “변호사들은 흔히 판사들을 신(神)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라며 “이 사건 배심원들도 오늘 하루 신이 돼 피고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니, 신중하고 깊이 있게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검사는 사건 직후 권씨의 행동을 부각하며 “피해자가 공중에서 수회 회전하고 나가떨어질 정도로 충격이 컸는데도 상당 시간 차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며 “구급 조치를 위해 1분 1초가 아까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권씨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가장 분개하는 부분”이라고 반박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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