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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송어 낚시하며 흐르는 물과 얘기 나눈 계곡의 하루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6)

플라이낚시를 하는 나는 해마다 봄이면 그해의 낚시를 시작한다. 주로 가는 강원도의 계곡에는 무지개 송어가 살고, 내가 '늠름한 나무'라고 이름 붙인 멋진 나무가 있고,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순한 얼굴의 커다란 개가 산다.

번개를 만난 것은 십 년도 더 된 예전이다. 그 시절 번개는 아는 척을 하면 좋다고 앞발을 번쩍 들어 매달리곤 했었다. 일어서면 키 작은 나에겐 어깨에 닿았다. 이제 번개는 거의 누워있다. 이름을 부르면 꼬리만 철썩철썩 바닥에 몇 번 내리치는 게 반갑다는 아는 척의 전부이다. 그마저도 해마다 봄이 되어 그 계곡을 찾을 때면 걱정한다. 건강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번개가 반겨줄까. 혹여 겨울 동안 무지개다리를 건넌 것은 아닐까.

해마다 봄이면 플라이낚시를 하러 가는 강원도의 한 계곡에 가면 '번개'라는 이름의 순한 개를 만난다. 매년 반겨주는 '번개'가 어느날 안 보이면 마음부터 덜컥한다. [사진 전명원]

해마다 봄이면 플라이낚시를 하러 가는 강원도의 한 계곡에 가면 '번개'라는 이름의 순한 개를 만난다. 매년 반겨주는 '번개'가 어느날 안 보이면 마음부터 덜컥한다. [사진 전명원]

작년 가을 끝자락에 계곡 낚시를 접으며 번개를 만나 인사를 건넸다. "내년 봄에도 건강하게 다시 보자!" 올해 봄이 되어 찾아갔을 때 번개가 없어 마음이 덜컥했다. 그러나 다행히 번개 집도, 번개 목줄도 그대로 있었고, 집 앞에 낯익은 밥그릇도 그대로였다. 주인 따라 산책하러 나갔나 보구나. 먼 걸음에 만나지 못해 서운했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축대를 뚫고 비스듬하게 자란 커다란 나무가 있다. 도로에서는 마치 땅에서 올라온 나무 같지만 아래로 내려가 보면 축대 중간을 뚫고 나와 있다. 당연히 길보다 나무가 더 오랜 세월 동안 먼저였을 것이다.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축대를 쌓으며 길을 낸 듯했다. 독특하면서도 웅장한 기분이 드는 나무이다. 그러면서도 축대 중간으로 줄기가 휘어 나와 뻗어 올라간 나무는 안쓰럽기도 하다. 십 년 넘게 그 계곡을 다니면서도 나는 아직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이름 붙이길 '늠름한 나무'다. 마을에 들어서며 눈인사를 하고, 낚시를 마치고 나오며 항상 그 나무 밑에서 낚싯대를 정리한다. 그리고 가끔 나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그 '늠름한 나무'에겐 반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항상 공손하게 인사했다. "잘 지냈나요, 늠름한 나무님?" "내년 봄까지 잘 지내요, 늠름한 나무님!"

강원도 인적 없는 계곡에서 혼자 걷고, 앉아 쉬다보면 나무와 흐르는 물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 엘리스가 된 듯 하다. [사진 전명원]

강원도 인적 없는 계곡에서 혼자 걷고, 앉아 쉬다보면 나무와 흐르는 물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 엘리스가 된 듯 하다. [사진 전명원]

나는 대부분 평일에 낚시를 한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인가가 적은 시골마을 동네에서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언젠가 한 번은 동네 할머니 두세 분이 나무 그늘에 앉아 내가 낚시하는 것을 보았다. 낚시한 물고기를 모두 놓아주는 것을 보며 "애써 잡을 걸 왜 놔줘?", "놔줄 거면 뭐하러 낚시를 해?" 라며 웃는 소리에 나도 따라 웃었다.

인도도 따로 없는 왕복 1차선 도로의 마을은 하루 종일 조용하다. 설령 인도가 있었다 한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도로 역시 차가 거의 지나지 않는다. 가끔 도로가에 앉아 있을 때면 나무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어쩐지 시계토끼를 따라 들어온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낚시를 하기 전 강원도는 머나먼 곳이었다. 일 년에 한 번도 강원도 땅을 밟지 않는 해도 많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 봄가을이면 매주 강원도를 간다. 강원도 인적 없는 계곡에서 나는 혼자 걷고, 아무데서나 앉아 쉬고, 나무와 흐르는 물에게 말을 건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 앨리스처럼 매 순간은 그렇게 모험이 된다.

강원도 계곡에서 낚시로 잡은 송어 한 마리. [사진 전명원]

강원도 계곡에서 낚시로 잡은 송어 한 마리. [사진 전명원]

물이 맑았다. 긴 계곡의 아래부터 위까지 한 번씩 들어가 본다. 간간이 송어를 낚았다. 낚싯줄을 던지는데 철교 위로 화물 기차가 지나갔다. 빠앙, 길게 경적을 울렸다. 김광섭 시인은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 생의 감각을 흔들어준다고 했는데, 화물 기차의 요란한 경적소리는 알람처럼 내 하루의 감각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낚싯대를 접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낚싯대를 접고 돌밭을 천천히 걸어 도로 위로 올라왔다. 문득, 예전에 누군가 내게 질문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낚시가 왜 좋아요?" 달궈진 돌밭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그때 내가 뭐라 대답했던가는 잊었고 질문만 남았다. 잠시 도로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잠시 적요의 순간이 찾아왔다.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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