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또 미국에 버림받고 중국에 무시당할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1.05.31 00:44

업데이트 2021.05.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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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문재인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정말 극진히 대접받았다”고 했다. 양국은 한·미 동맹의 영역을 군사·안보에서 경제·기술로 확장했다. 세계 최강국이 우리를 환대한 것은 좋은 일이다.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분야에서 44조원을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기업의 파워 덕분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황제 대접은 푸대접으로 바뀔 것이다. 역사의 상처가 실증하고 있다.

‘극진 대접’이 ‘푸대접’ 될 수 있어
우리가 잘살고 강해지는 게 살길
양보 불가의 가치·전략 준비해야
강대국 눈치 보는 게 외교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최초로 수교한 것은 139년 전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조선은 “미국이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고 보호해 줄 것”으로 믿고 ‘연미(聯美)’ 노선을 결정했다. 고종은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조약 1조는 어느 한 나라가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 즉 부당한 처사나 모욕 또는 위협을 당했을 경우에는 다른 일방이 중재에 나서는 조항이다. 그러나 미국은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때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묵인하는 조건으로 양해했다. 조약은 휴지 조각이 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결과였다.

1949년에는 한국의 애소(哀訴)에도 불구하고 7만 명의 미 육군 24군단을 전원 철수시켰다. 북한은 1년 뒤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트루먼 행정부는 1951년 5월 결정한 NSC 48/5(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미국의 아시아 정책)와 12월의 NSC 118/2(정전협상에 임하늉는 지침)에 의해 일본·필리핀·호주·뉴질랜드와 달리 한국은 미국의 방위동맹 대상국에서 제외했다. 북한·중공의 침략에 목숨 걸고 싸워 한국을 지켜놓고 다시 버리기로 한 것이다. 힘없는 계륵(鷄肋) 한국에 대한 강대국의 이율배반적 결정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떠나가려는 미국을 상대로 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해 한·미 동맹을 성사시킨 인물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미국은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고 고분고분한 장면을 2대 대통령으로 취임시키려고 했다(『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대통령』 이영일). 워싱턴에서는 이승만 정부 전복을 위한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을 놓고 국무부, 합참, 백악관, 국방부, CIA 등 5개 부서 합동회의까지 열렸다(『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남시욱).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명예로운 휴전’에 ‘단독 북진 통일’로 맞서면서 반공포로 2만7000명을 기습적으로 석방한다. 아이젠하워는 백악관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은 우리의 적”이라고 했고,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승만이 우리 등에 칼을 꽂았다”고 성토했다. 훗날 마오쩌둥은 “정작 무서운 적은 미국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이승만이었다”고 했다. 한국은 ‘괴뢰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특사 월터 로버트슨에게 “조선과 체결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린 미국이 해방 후 한반도를 두동강내더니 지금 우리에게 일방적 휴전을 강요하는 상황은 또 하나의 팔아넘기기(sell out)”라고 비난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와 청나라 이홍장의 협상 결과다. 조선이 협상을 청나라에 위임한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홍장은 “조선은 청의 속국이다”는 문장을 조약 1조에 넣으려고 했다. 슈펠트는 강력히 반대했다. 조선에서 미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타협이 됐다. 나라 꼴이 우습게 됐다. 미국이 우리를 배신했다면 중국은 무시한 셈이다.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자기가 선한 리더이며 세상을 향해 빛을 내리비추는 ‘신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나라다(『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김준형). 하지만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가차없이 버렸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는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빼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국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다.

중국은 북핵에 대비하는 한국의 자위적 조치인 사드 배치에 대해 무차별 경제보복을 한 나라다. 국빈 방문한 문 대통령에게 ‘혼밥’ 모욕을 줬다. 미국이 요청한 사드 배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도 미국은 침묵했다. 한·미 동맹 중시 노선을 더 분명히 할 때 중국의 거친 보복을 미국이 막아줄 거라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동맹국이 맞는가.

믿을 건 우리 자신뿐이다. 잘살고 강해져야 한다. 이승만처럼 국익을 위해 사활을 걸겠다는 결기가 있어야 한다. 적당히 미국에 잘 보이고, 중국에 미움받지 않는 것이 외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경제 강국이고, 전 세계가 인정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국가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와 정체성,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호랑이가 되려면 먼저 전모(全貌)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줏대 없이 휘둘리면 야성(野性)이 실종된 고양이만 남는다. 치욕의 역사를 소환한다.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어떤 강대국도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는 없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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