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총선 공천 무렵에 유승민·이혜훈 전 의원 사이 오간 문자가 떠올랐다. 유 전 의원이 김형오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에게 “이혜훈은 컷오프, 지상욱·민현주는 수도권 경선, 하태경은 경선…. 이런 결과가 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다고 하자 이 전 의원이 “지금은 1분 차이로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 보니 무도하게 구는 것 용서해 주세요”라고 답하는 내용이었다. 유 전 의원은 당시 미래통합당으로의 합당 직후 불출마 선언과 함께 두문불출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 의원은 서울 동대문을로 갔고, 자신이 3선 했던 서울 서초갑엔 윤희숙 의원이 공천됐다.
유승민계로 분류되나 실상은 미묘 #"이젠 갑이 이 전 최고위원" 주장 #세대교체 넘어 정치 달라질 수도
6·11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준석 전 최고위원을 두고 ‘유승민계’라고 해서 든 생각이다. 전통적으로 계파 작동 원리의 요체는 정치적, 특히 공천 영향력에 있다. 이 전 의원이 SOS 치고 유 전 의원이 구명(救命)에 나선 배경이리라.
그렇더라도 ‘유승민계’는 좀 애매한 데가 있다. 저간 사정에 밝은 당료에게 “유승민계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 역시 “있다는 게 틀린 얘기도, 맞는 얘기도 아니다”고 했다. ‘맞는 얘기가 아니다’란 건 ‘계파’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친이·친박·친문과 같은 점도(粘度)는 아니란 의미다. 유 전 의원과 가깝다고 알려진 한 정치권 인사는 “다들 유 전 의원을 좋아하지만 누가 말을 듣나”라고 했다. 각자 자율성이 높다는 의미다.
이에 비해 ‘틀린 얘기도 아니다’란 건 이들끼리는 수시로 만나 논의한다는 뜻이다. 탄핵 이후 역정을 같이해 온, 일종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like-minded group)’이어서다. 바른정당계로, 이 중에서도 김무성계를 제외한 이들이다. 김무성계와 달리 자체 대선후보를 내려 했고 결국 유 전 의원이 완주했다. 김무성계와 갈라선 이후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한때 바른미래당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들을 거칠게 표현하면 김무성·안철수와는 거리감 있고, 이념적으론 보수이되 기존 노선으론 안 된다는 쪽이라고 하겠다.
이 전 최고위원에게 계파 꼬리표를 붙이나 실상은 복잡미묘하다는 뜻이다. 이 전 최고위원과 가장 논의를 많이 한다는 하태경 의원의 말도 그랬다.
-출마 과정에서 상의했다고 들었다.
“사실 나도 당 대표를 옵션 중에 하나로 고민했는데 나에게 ‘나오지 말고 대선에 나가라’고 하더라. 말의 포인트는 대선에 나가라는 것보다는 당 대표 나오지 말라는 데 있었다(웃음). 잘됐다. (이 전 최고위원이) 1등이 되어서 이 현상이 생긴 건데 (내가 출마했다면) 표가 나뉠 뻔했다.”
-유승민계 차원의 논의는.
“젊은 층 잡는 노력은 거의 나와 이 전 최고위원이 했다.”
-유 전 의원의 발언권이 있었나.
“적극 반대 안 했지만 수용도 안 했다.”
정치권의 또 다른 인사는 더 나아가 “이젠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 이제 갑은 이 전 최고위원”이라고까지 말했다. 하기야 이 전 최고위원은 자신을 발탁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발탁은) 고마운 거고 탄핵에 대한 후회 역시 딱히 없다”고 했다.
덜 부각된 사실 중엔 이 전 최고위원이 사실상 캠프도 꾸리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당료는 “정말 없나 알아봤더니 진짜로 없더라. 주변엔 의견을 묻긴 해도 직접 다 한다”고 했다. 35세의 당협위원장(순천-광양-곡성-구례갑)인 천하람 변호사도 “이 전 최고위원의 개인기”라고 했다. 주요 정당 대표 경선이 이렇게 치러진 적은 없다.
기존 정치 문법으로 보면 이 전 최고위원은 확실히 ‘이단아’다. 한 세대를 건너뛴다는 그 이상이다. 36세의 그가 당선된다면 그 자체로 변화지만, 그가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낼 변화 또한 어디에 이를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에게 묻는 질문이 유승민계 여부에 집중되는 건 정략적 단견일 뿐 아니라 상상력 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