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기상, 논문은 세 편 쓰는 38년차 배우 남경주

중앙일보

입력 2021.05.30 12:08

뮤지컬 배우 남경주 씨가 28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뮤지컬 배우 남경주 씨가 28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선물, 팬레터가 자가용 하나 가득 찼다.” 뮤지컬 배우 남경주(57)의 1990년대는 팬의 ‘끝이 보이지 않는 줄’로 기억된다. “공연 끝나면 팬들이 줄을 쫙 서요. 꽃, 인형, 편지를 들었는데 끝이 안 보이고…. 그 앞을 걸어가면 머리카락 쥐어 뜯기고, 옷은 찢어지고….”

“나는 1세대가 아니라 1.5세대”라며 선배들의 이름을 읊지만, 팬을 몰고 다닌 첫 뮤지컬 배우라는 점은 확실하다. 현재 활동하는 수많은 배우가 그를 ‘롤모델’로 꼽는다. 데뷔는 서울시립가무단 시절의 1984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 37년 전이다.

이달 21일은 남경주가 뮤지컬 ‘위키드’에 300번째 출연한 날이었다. 2013년부터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깨달음을 일깨우는 마법사 역할을 맡았고, 2016년에 맹장염으로 쉰 일주일 말고는 계속 출연했다.

한 작품 300회는 배우에게 대단한 기록이지만, 개인 신기록은 아니다. 2004년 초연한 뮤지컬 ‘아이러브유’에서는 첫 시즌 594회를 포함해 2009년 앙코르까지 총 830회 출연했다.

“공연 개수, 출연 횟수를 세어본 적이 없다. 다만 미국에 있던 2년 말고는 한 해도 쉬지 않았고, 한해 100회로 치면….” 적어도 3500회다.“한 4000번 무대에 섰다 본다.”

남경주는 지난해부터 홍익대 공연예술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4000여번 공연한 배우 인생의 안정적 후반기로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지대 뮤지컬과에서 박사 2학기째다. 써야할 논문은 셋. 박사 과정 필수인 학술 논문, 홍익대의 신임 교원 논문, 그리고 박사 졸업 논문이다.” 박사 과정에서‘뮤지컬 콘텐트 개발’‘연출자 연구’ 같은 수업을 들으며 다른 대학에서는 연기ㆍ발성 실기를 지도한다.

그의 일과는 이렇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난다. 무조건 연구실에 가서 수업 준비하고, 논문 자료 모으고, 박사 수업의 발표를 준비한다.” 오후엔 극장으로 향한다. “공부가 덜 끝난 날엔 자료를 싸들고 분장실로 간다. ‘위키드’에서 내 역할 마법사는 한시간 반이 지나야 나온다. 그동안 공부할 자료를 들여다본다.”

남경주는 자신의 하루에 대해 “지루할 정도로 규칙적”이라고 했다. “그게 너무 좋다. 단순한 하루를 보내면 고민하거나 괴로울 틈이 없다.” 부단히 배우는 배우다. 코로나19로 중단하긴 했지만 지난해까지도 발레, 탭 댄스, 노래까지 선생님을 찾아가 익혔다. “세상에 고수가 많다. 탭 댄스를 무대에서 그렇게 오래 했지만 탭 댄스만 하는 사람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다.”

남경주가 ‘성실의 아이콘’이 된 건 20년 남짓이다. 구름떼 팬이 기다리던 90년대까지 인기에 취해 살았다. “형님(남경읍 배우, 63)이 무대 서는 걸 본 중학생 때 ‘멋있으려고’ 배우가 되고 싶었다.‘스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나의 열정이었다.” 이름이 알려지고 팬들의 줄이 길어지는 데에는 10여년이 걸렸다. “부끄럽지만 인기로 견뎠다.”

‘99년 정동진’이 인생의 전환점이다. “그해 크리스마스 정동진 바닷가 무대에 서고 서울에 왔는데 친구들과 밀레니엄 파티를 하고, 바로 앓아누웠다.” 무대 출연은 많았고, 술도 많이 마시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틀 아팠다. 바로 눈 앞에 휴대전화가 있는데 손 뻗어 전화기를 잡을 수도 없어 혼자 앓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집으로 들어갔고, 매일 아침 뛰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무대에 서서 돈을 벌면 그 돈을 펑펑 썼다. 그러면서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다. ‘인생 그냥 끝나겠다’‘좋은 배우는 커녕 삶도 어렵겠다’ 싶으면서 바닥을 딛고 올라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못살게 구는’ 배우가 됐다. “카이사르의 말을 믿는다. ‘승리는 신념, 신념은 지식, 지식은 훈련에서 비롯된다’는. 땀을 흘리고 눈물을 쏟아야 한다. 고통스럽게 몸을 훈련시키면 무대에서 춤 출 때 음악과 놀게 되고, 연기할 때 상대 배우의 모든 감정을 알게 된다.”남경주는 “놀만큼 놀아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며 웃었다.

지금도 매일 몸을 혹사하면서, 그는 계속하는 것 자체로 영감이 되기를 꿈꾼다. “후배들이 보기에 ‘저 선배도 건강히 계속하는데 우리도 한번 가보기는 하자’ 그 정도면 된다.”

코로나19로 무대에 서지 못할 때도 할 수 있는 일은 나서서 했다. “지난해 2월 ‘빅피쉬’후 여름 ‘맘마미아’가 취소되며 9개월 정도 아무 공연도 못했다. 대신 질병관리청,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가고 뮤지컬 종사자 기자회견의 사회를 봤다. 무대로 성장하고 버텼으니 감사함을 돌려줄 때라고 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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