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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상자 전용 사소한 커터, 정성 다한 디자인 예술이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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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호 24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트로이카 커터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전시에 다녀왔다. 새로 지은 멋진 미술관을 채운 픽셀 그림 ‘4900가지 색채’는 생각보다 컸다. 빨강·파랑·노랑의 원색에 녹색을 더해 파생시킨 총 25가지의 사각형 색 조각을 무작위 배열한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대단했다. 리히터의 이력을 열심히 설명해주는 도슨트 덕분에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작가가 친숙하게 다가왔다. 규정되기도 싫고 섣부른 유형에 끼이기도 싫은 예술가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스테인리스 재질, 안전하고 강력 #뒤쪽에 홈 있어 병따개로도 사용 #리히터 그림, 페인트 가게서 영감 #위대한 예술은 생활 속에서 탄생 #꼭 필요한 것 다 있는 유럽 공구상 #편한 도구 찾기 힘든 한국과 대조

택배 상자 전용 커터

택배 상자 전용 커터

흥미로운 사실은 리히터 작업이 페인트 가게에 걸려있는 색상 샘플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원하는 색을 쉽게 고르기 위한 색상표에서 위대한 현대 예술이 태어난 셈이다. 나 또한 독일의 페인트 가게에 세워놓은 색상 디스플레이를 인상적으로 봤다. 평소 우리가 보던 칼라샘플 북 같은 게 아니었다. 사람 키보다 큰 패널에 큼직하게 연속된 색상이다. 조각 하나가 스마트폰만 하다. 한눈에 동색 계열의 색채가 일목요연하게 파악된다. 실제 제집에서 어떤 느낌인가 확인되도록 같은 색온도와 밝기로 조명까지 했으니 색채의 변별력도 크다. 삼원색과 무채색 계열로 분리된 샘플 패널 하나를 옮겨 놓으면 마치 작품 같을 정도다.

마음에 드는 페인트의 색을 골라내는 과정이 수월한 건 이런 배려의 시설 때문이다. 사이와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자신만의 색상 선택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감탄했던 유럽의 세련된 색채 감각은 필요한 것을 앞질러 준비해 놓는 디테일에 있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자. 동네 페인트 가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규모가 큰 대형 마트에서도 이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있다 하더라도 손톱만 한 크기로 인쇄된 샘플 북이 전부였을 것이다. 이를 보고 원하는 색상을 골라낼 수 있을까? 전문가라 뻐기던 이들조차 비슷비슷한 색채가 연속되는 색상 샘플 더미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급기야 색의 최종 선택은 대충 아무거나로 결정되거나 가게 주인의 조언에 따랐을 확률이 높다.

독일 브랜드 트로이카의 택배 전용 커터. [사진 윤광준]

독일 브랜드 트로이카의 택배 전용 커터. [사진 윤광준]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많이 보이는 간판 중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있다. 유명한 디자인 건축학교인 바우하우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공구와 전기용품을 포함한 일체의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양판점이다. 인건비가 비싼 나라라서 웬만한 집수리나 인테리어를 스스로 하는 보통 사람들이 고객이다.

여기서 취급하는 각종 물품의 다양성과 세분화는 놀랍다. 원하는 색깔의 페인트와 나사못은 물론 각기 다른 곡률의 수도관까지 두루 갖추어 놓았다. 도구와 자재 또한 마찬가지다. 왼손잡이를 위한 칼과 가위의 구비는 보통이다. 용도에 따라 세분화된 펜치나 망치의 가짓수를 보고 놀라자빠질 뻔했다. 촘촘하다 못해 섬세하고 치밀한 배려는 당연히 사용자의 편리와 효율성에 맞추어진다.

‘생활의 달인’이란 TV 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이들의 놀라운 숙련도와 몰입의 자세에 숙연함마저 든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도구를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쓰고 있는 칼에 녹색 테이프와 고무줄을 감아 제 손에 맞추는 걸 봤다.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는 쓰는 국자의 손잡이를 휘어 놓았다. 이들 달인이 제 손에 맞는 도구를 들었다면 이런 궁상까지 떨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작업자의 피로도를 줄이고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만들어지는 건 세상을 위한 좋은 기여다.

독일 브랜드 트로이카의 택배 전용 커터. [사진 윤광준]

독일 브랜드 트로이카의 택배 전용 커터. [사진 윤광준]

우연히 한 달 동안 배달된 택배 상자를 세어보았다. 무려 12개였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까지 합치면 스무 개다. 택배를 받을 때마다 불편과 짜증이 이어진다는 걸 알았다. 담긴 내용물이 잘못되거나 파손되어서가 아니다. 철벽으로 둘러진 박스 테이프와 완충재가 든 비닐 책 배송 봉투의 강력한 접착력 때문이다. 게다가 어찌나 테이프가 질긴지 침침한 눈으로 더듬대며 손으로 떼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슬프지만 테이프와 힘겨루기하며 사는 게 요즘의 내 모습이다.

날카로운 커터 칼로 박스의 모서리에 정확하게 넣고 테이프를 갈라야 한다. 어떤 택배 박스는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단번에 열리지 않는 것도 있다.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실제 해 보면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칼날이 무뎌져 깨끗하게 잘리기는커녕 외려 테이프의 끈끈이가 묻어 뭉치기도 한다. 힘을 주다 보면 갑자기 깊게 들어가 내용물까지 망가뜨리는 일이 빈번하다. 당연히 열려야 할 박스는 요지부동이고 책 표지까지 칼질로 난도 당한다면 누군들 짜증 나지 않으랴. 억지로 칼질하다 손을 베인 적도 있다. 도덕군자 연하는 이들조차 이런 일 당하면 길길이 뛴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택배 박스 전용 커터가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별 이상한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작 내가 원하는 도구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본제 커터들이 몇 개 있긴 했다. 기존 커터에 손 보호용 커버가 붙은 팬시 상품에 가까웠다. 택배 커터의 전성시대가 열렸을 거란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필요하면 끝까지 파헤쳐 찾아내는 게 나의 특기다. 택배 전용 커터를 드디어 발견했다. 독일에서 디자인한 ‘트로이카(TROIKA)’ 제품이다. “역시!”란 감탄이 먼저 튀어나왔다. 필요를 앞서는 도구의 구비가 문화적 전통 아니던가. 사소해 보이는 커터에 정성을 다한 디자인에 믿음이 갔다. 택배 박스 커터로 용도를 한정시킨 최적화된 기능과 형태다. 칼날이 손에 닿지 않도록 갈고리 형태의 환도로 처리해 테이프만 가르고 끊는다. 뒤쪽엔 홈을 파 병따개로 쓴다. 마치 해마 모양으로 보여 앙증맞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커터는 안전하고도 강력했다. 택배 상자를 지그시 누르고 앞쪽으로 쓰윽 당기면 철벽의 테이프도 힘을 못 쓴다. 내용물이 다칠까 봐 조심스러울 일도 없다. 이 커터를 쓰다 보니 이상한 쾌감이 든다. 걸그적 거리는 건 모두 잘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면 크기가 작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예전에 산 오를 때 쓰던 자일 연결용 대형 캐러비너(연결고리)를 달았다. 일부러 본체보다 훨씬 큰 고리를 단 이유란 뻔하다. “이래도 못 찾을래!”란 나를 위한 시그널이니까.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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