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오디세이] ‘배구계 허재’ 노진수

노진수 감독이 금호중 선수들에게 공을 던져주며 수비 훈련을 시키고 있다. 노 감독은 늘 기본기를 강조한다. 송봉근 기자
1990년대 초·중반, 농구와 배구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농구대통령’ 허재가 기아자동차의 전성기를 이끌 때 배구에는 노진수가 있었다. 허재와 같은 84학번인 노진수는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활약했다.
2015년 영천 금호중 창단 사령탑 #기량 따라 맞춤 훈련, 지난해 우승 #아이들 기본기와 인성 가장 중요 #‘잘 하려다 실수’ 야단치면 안 돼 #성균관대·LG화재 프로 감독 역임 #스타 출신들 꿈나무 육성 힘써야
성균관대 1학년 때 LA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된 노진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9년 동안 태극마크를 놓치지 않았다. 1m88㎝로 레프트 공격수로서 큰 키는 아니지만 용수철 같은 탄력과 탄탄한 수비를 겸비한 선수였다. 1992년 상무가 군 팀 최초로 대통령배 배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할 때 주역도 노진수였다.
노진수는 경북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금호중 체육교사 겸 배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성균관대와 프로팀 LG화재 감독을 역임한 스타 출신이 시골 중학교로 내려오자 “여기서 좀 쉬었다가 서울에 좋은 자리가 나면 바로 올라갈 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2015년 창단 감독으로 온 노진수는 7년째 배구 꿈나무들과 씨름하고 있다. 금호중은 지난해 종별배구선수권대회 남중부 우승을 차지했다. 올해 첫 출전이었던 태백산기 대회에서도 4강에 올랐다.
KTX 신경주역에 내려 자동차로 20분 정도를 더 달려 금호중 체육관에 도착했다.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모두 밝았다. 꽃미남 스타에서 후덕한 중년이 된 노 감독이 직접 볼을 쳐 주며 수비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성적에 연연하면 고학년만 쓰게 돼
![1992년 배구 월드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는 노진수.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05/29/9a1098c1-ceda-46b2-baab-59bdbfddff53.jpg)
1992년 배구 월드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는 노진수. [중앙포토]
- 여기도 코로나19 영향을 받지 않았나요.
- “방역 단계 높아졌을 때 한 달 정도 집에서 체력훈련만 하게 했어요. 요즘은 정상적으로 대면 수업을 하고 있어서 선수들은 정규수업 마친 뒤 체육관에서 늦게까지 훈련을 합니다. 전용 체육관이 있어서 운동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지요.”
- 태백산기 준결승에선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반복돼 졌는데 화가 나지 않았나요.
- “당연히 화가 나죠.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건 아닙니다. 대회에 나가면 아이들이 흥분하기도 하고 더 잘 하려고 오버하다가 미스 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크게 야단은 치지 않습니다. 중학생이니까 충분히 나올 수 있고,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어떻게 중학교 팀을 맡게 됐나요.
- “배구부 창단하려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서울로 올라온다고 하기에 후배 소개시켜 주려고 만났어요. 거기서 마수에 걸리고 말았죠(웃음). 팀을 맡아달라는 간청을 뿌리치기 어려웠고, 저도 어릴 적 시골에서 어렵게 배구를 배운 터라 아이들을 한번 가르쳐 보고 싶었거든요.”
- 남다른 훈련 프로그램이 있나요.
-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하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 현재 기량과 수준에 맞춰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짜 준다는 겁니다. 늦게 시작한 아이도 있고, 성장이 좀 느린 아이도 있습니다. 처지면 처지는 대로 그 수준에 맞춰 가르칩니다. 부모님이나 애들은 당장 잘하고 싶겠지만 저는 ‘천천히 함께 가자’고 달랩니다.”
- 지도자도 마음이 급하지 않습니까.
- “그렇죠. 당장 성적이 중요하니까요. 중학교 과정에서는 1년 차이가 크기 때문에 3학년이 신체·기량 등에서 당연히 앞서죠. 그러니 지도자들은 잘하는 애, 고학년 위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에이스는 혹사당하고, 후보는 벤치만 지켜야 하는 악순환이죠. 저는 후반기에 접어들면 1,2학년 위주로 팀을 구성해서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편입니다.”
‘좋은 자리 나면 가겠지’ 편견 시달려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게 뭔지 물으니 ‘기본기와 인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지금 성장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느는 속도가 확실히 빠릅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 눈에 확 띄어도 발전에 한계가 있어요. 인성은 좀 포괄적이긴 한데, 작은 일에 거짓말하지 말고, 약속시간 등 기초적인 걸 지키자는 겁니다. 그런 사소한 게 더 큰 인성교육의 밑바탕이 됩니다.”
- ‘프로 감독까지 한 사람이 시골 중학교에 얼마나 있겠어?’ 하는 시선을 느끼지 않았나요.
-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좋은 자리 나면 금방 가겠지’ 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 꽤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은 그런 이야기 쏙 들어갔죠. 요즘은 애들이 귀하잖아요. 배구가 기본기를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한 운동이어서 초창기에는 선수 하나하나가 다 귀했죠. 거의 24시간 붙어 있을 정도로 생활을 같이 했지요. 깨워서 학교 보내고 밥도 같이 먹고, 빨래도 가르쳐주고…. 지금은 체계가 잡혀서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 아이들이 노진수를 아나요.
- “컴퓨터 배구 게임에 제가 나오니까 ‘진짜 그분이 이분인가’ 하고 물어보는 아이들은 있었어요. 요즘 애들은 별 관심 없는 것 같아요. 학부모는 간혹 옛날 팬이었다는 분도 있고, 스타 출신이니까 좋아들 하시죠. 저를 믿고 아이를 맡겨주시는 분도 있고, 입소문도 조금씩 나고요.”
- ‘배구계 허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는데요. 언제가 전성기였나요.
- “운동 그만둘 때쯤인 것 같아요. 군대(상무)에서 뛰던 28~29세쯤? 그전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멋도 모르고 한 것 같고. 조금 배구를 알겠다 싶을 때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죠. 당시는 프로가 없어서 생계를 위해서는 일찍 그만두고 직장에 들어가거나 지도자로 변신하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 최근 배구계에서 폭력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데요.
- “정말 안타깝죠. 피해를 당한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지내고 어쩌면 선수 생명이 끊어질 수도 있잖아요. 저도 선수 시절 그런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거든요. 맞는 거 싫고 때리는 것도 싫은데 단체운동이다 보니 그런 경우가 있었죠. 지도자들이 타성에서 벗어나 먼저 반성하고 바뀌어야 이 폭력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 배구하려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추세인데요.
- “선수로 명성을 떨쳤던 지도자들이 지역으로, 초-중-고로 내려와서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배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으면 좋겠어요. 클럽에서 취미로 배구를 즐기는 차원에서 끝날 게 아니라 재능 있는 아이들이 엘리트 선수로 클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 언제까지 중학교에 계실 겁니까.
- “교사 신분이니까 정년퇴직하면 떠나야죠. 어느 정도 팀은 만들어졌는데 아무래도 수도권을 포함한 타지에서 선수들을 모아 와야 하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한 게 있어요. 아이들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뒤에는 미련 없이 떠나야죠.”
키 195㎝ 어르헝 일취월장…배구 코트 몽골 바람
![몽골 출신의 1m95㎝ 최장신 배구선수 목포여상 어르헝(가운데). [사진 더 스파이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105/29/492841de-7ce8-4416-a4eb-5c2049f5e63e.jpg)
몽골 출신의 1m95㎝ 최장신 배구선수 목포여상 어르헝(가운데). [사진 더 스파이크]
금호중 2학년 공격수 신재민은 키 1m88㎝로 노진수 감독과 같다. 신재민은 경기도 수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노 감독 밑에서 배우기 위해 영천으로 내려왔다. 배구와 씨름 선수로 뛰었던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민이는 “감독님이 잘 가르쳐 주시고, 여기는 모든 게 다 좋아요”라며 웃었다.
배구는 리시브와 토스, 스파이크 등 기본기를 익히는 게 상당히 까다롭다. 키만 크다고 배구를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지도자들은 “선수감을 찾기가 갈수록 어렵다”고 푸념한다. 이 틈새를 다문화 가정 아이들, 그리고 몽골 출신 선수들이 파고든다.
올해 만 17세인 체웨랍당 어르헝은 2019년에 동갑내기 샤눌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목포여상에서 정진 감독의 지도로 기량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어르헝의 키는 1m95㎝로 국내 최장신 김연경(1m92㎝)보다 크다. 그가 이대로 성장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면 양효진(1m90㎝)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센터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남자 팀에도 몽골 출신 에디(성균관대·1m98㎝), 바야르사이한(인하대·1m97㎝)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노진수 감독은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몽골 선수들이 한국 배구의 취약한 저변을 커버해 주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영입이나 과도한 경쟁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