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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함께 가자” 7년째 시골 중학 꿈나무들 담금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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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호 26면

[스포츠 오디세이] ‘배구계 허재’ 노진수

노진수 감독이 금호중 선수들에게 공을 던져주며 수비 훈련을 시키고 있다. 노 감독은 늘 기본기를 강조한다. 송봉근 기자

노진수 감독이 금호중 선수들에게 공을 던져주며 수비 훈련을 시키고 있다. 노 감독은 늘 기본기를 강조한다. 송봉근 기자

1990년대 초·중반, 농구와 배구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농구대통령’ 허재가 기아자동차의 전성기를 이끌 때 배구에는 노진수가 있었다. 허재와 같은 84학번인 노진수는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활약했다.

2015년 영천 금호중 창단 사령탑 #기량 따라 맞춤 훈련, 지난해 우승 #아이들 기본기와 인성 가장 중요 #‘잘 하려다 실수’ 야단치면 안 돼 #성균관대·LG화재 프로 감독 역임 #스타 출신들 꿈나무 육성 힘써야

성균관대 1학년 때 LA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된 노진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9년 동안 태극마크를 놓치지 않았다. 1m88㎝로 레프트 공격수로서 큰 키는 아니지만 용수철 같은 탄력과 탄탄한 수비를 겸비한 선수였다. 1992년 상무가 군 팀 최초로 대통령배 배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할 때 주역도 노진수였다.

노진수는 경북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금호중 체육교사 겸 배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성균관대와 프로팀 LG화재 감독을 역임한 스타 출신이 시골 중학교로 내려오자 “여기서 좀 쉬었다가 서울에 좋은 자리가 나면 바로 올라갈 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2015년 창단 감독으로 온 노진수는 7년째 배구 꿈나무들과 씨름하고 있다. 금호중은 지난해 종별배구선수권대회 남중부 우승을 차지했다. 올해 첫 출전이었던 태백산기 대회에서도 4강에 올랐다.

KTX 신경주역에 내려 자동차로 20분 정도를 더 달려 금호중 체육관에 도착했다.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모두 밝았다. 꽃미남 스타에서 후덕한 중년이 된 노 감독이 직접 볼을 쳐 주며 수비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성적에 연연하면 고학년만 쓰게 돼

1992년 배구 월드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는 노진수. [중앙포토]

1992년 배구 월드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터뜨리고 있는 노진수. [중앙포토]

여기도 코로나19 영향을 받지 않았나요.
“방역 단계 높아졌을 때 한 달 정도 집에서 체력훈련만 하게 했어요. 요즘은 정상적으로 대면 수업을 하고 있어서 선수들은 정규수업 마친 뒤 체육관에서 늦게까지 훈련을 합니다. 전용 체육관이 있어서 운동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지요.”
태백산기 준결승에선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반복돼 졌는데 화가 나지 않았나요.
“당연히 화가 나죠.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건 아닙니다. 대회에 나가면 아이들이 흥분하기도 하고 더 잘 하려고 오버하다가 미스 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크게 야단은 치지 않습니다. 중학생이니까 충분히 나올 수 있고,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어떻게 중학교 팀을 맡게 됐나요.
“배구부 창단하려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서울로 올라온다고 하기에 후배 소개시켜 주려고 만났어요. 거기서 마수에 걸리고 말았죠(웃음). 팀을 맡아달라는 간청을 뿌리치기 어려웠고, 저도 어릴 적 시골에서 어렵게 배구를 배운 터라 아이들을 한번 가르쳐 보고 싶었거든요.”
남다른 훈련 프로그램이 있나요.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하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 현재 기량과 수준에 맞춰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짜 준다는 겁니다. 늦게 시작한 아이도 있고, 성장이 좀 느린 아이도 있습니다. 처지면 처지는 대로 그 수준에 맞춰 가르칩니다. 부모님이나 애들은 당장 잘하고 싶겠지만 저는 ‘천천히 함께 가자’고 달랩니다.”
지도자도 마음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당장 성적이 중요하니까요. 중학교 과정에서는 1년 차이가 크기 때문에 3학년이 신체·기량 등에서 당연히 앞서죠. 그러니 지도자들은 잘하는 애, 고학년 위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에이스는 혹사당하고, 후보는 벤치만 지켜야 하는 악순환이죠. 저는 후반기에 접어들면 1,2학년 위주로 팀을 구성해서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편입니다.”

‘좋은 자리 나면 가겠지’ 편견 시달려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게 뭔지 물으니 ‘기본기와 인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지금 성장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느는 속도가 확실히 빠릅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 눈에 확 띄어도 발전에 한계가 있어요. 인성은 좀 포괄적이긴 한데, 작은 일에 거짓말하지 말고, 약속시간 등 기초적인 걸 지키자는 겁니다. 그런 사소한 게 더 큰 인성교육의 밑바탕이 됩니다.”

‘프로 감독까지 한 사람이 시골 중학교에 얼마나 있겠어?’ 하는 시선을 느끼지 않았나요.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좋은 자리 나면 금방 가겠지’ 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 꽤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은 그런 이야기 쏙 들어갔죠. 요즘은 애들이 귀하잖아요. 배구가 기본기를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한 운동이어서 초창기에는 선수 하나하나가 다 귀했죠. 거의 24시간 붙어 있을 정도로 생활을 같이 했지요. 깨워서 학교 보내고 밥도 같이 먹고, 빨래도 가르쳐주고…. 지금은 체계가 잡혀서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아이들이 노진수를 아나요.
“컴퓨터 배구 게임에 제가 나오니까 ‘진짜 그분이 이분인가’ 하고 물어보는 아이들은 있었어요. 요즘 애들은 별 관심 없는 것 같아요. 학부모는 간혹 옛날 팬이었다는 분도 있고, 스타 출신이니까 좋아들 하시죠. 저를 믿고 아이를 맡겨주시는 분도 있고, 입소문도 조금씩 나고요.”
‘배구계 허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는데요. 언제가 전성기였나요.
“운동 그만둘 때쯤인 것 같아요. 군대(상무)에서 뛰던 28~29세쯤? 그전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멋도 모르고 한 것 같고. 조금 배구를 알겠다 싶을 때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죠. 당시는 프로가 없어서 생계를 위해서는 일찍 그만두고 직장에 들어가거나 지도자로 변신하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최근 배구계에서 폭력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데요.
“정말 안타깝죠. 피해를 당한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지내고 어쩌면 선수 생명이 끊어질 수도 있잖아요. 저도 선수 시절 그런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거든요. 맞는 거 싫고 때리는 것도 싫은데 단체운동이다 보니 그런 경우가 있었죠. 지도자들이 타성에서 벗어나 먼저 반성하고 바뀌어야 이 폭력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배구하려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추세인데요.
“선수로 명성을 떨쳤던 지도자들이 지역으로, 초-중-고로 내려와서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배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으면 좋겠어요. 클럽에서 취미로 배구를 즐기는 차원에서 끝날 게 아니라 재능 있는 아이들이 엘리트 선수로 클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언제까지 중학교에 계실 겁니까.
“교사 신분이니까 정년퇴직하면 떠나야죠. 어느 정도 팀은 만들어졌는데 아무래도 수도권을 포함한 타지에서 선수들을 모아 와야 하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한 게 있어요. 아이들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뒤에는 미련 없이 떠나야죠.”

키 195㎝ 어르헝 일취월장…배구 코트 몽골 바람

몽골 출신의 1m95㎝ 최장신 배구선수 목포여상 어르헝(가운데). [사진 더 스파이크]

몽골 출신의 1m95㎝ 최장신 배구선수 목포여상 어르헝(가운데). [사진 더 스파이크]

금호중 2학년 공격수 신재민은 키 1m88㎝로 노진수 감독과 같다. 신재민은 경기도 수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노 감독 밑에서 배우기 위해 영천으로 내려왔다. 배구와 씨름 선수로 뛰었던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민이는 “감독님이 잘 가르쳐 주시고, 여기는 모든 게 다 좋아요”라며 웃었다.

배구는 리시브와 토스, 스파이크 등 기본기를 익히는 게 상당히 까다롭다. 키만 크다고 배구를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지도자들은 “선수감을 찾기가 갈수록 어렵다”고 푸념한다. 이 틈새를 다문화 가정 아이들, 그리고 몽골 출신 선수들이 파고든다.

올해 만 17세인 체웨랍당 어르헝은 2019년에 동갑내기 샤눌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목포여상에서 정진 감독의 지도로 기량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어르헝의 키는 1m95㎝로 국내 최장신 김연경(1m92㎝)보다 크다. 그가 이대로 성장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면 양효진(1m90㎝)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센터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남자 팀에도 몽골 출신 에디(성균관대·1m98㎝), 바야르사이한(인하대·1m97㎝)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노진수 감독은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몽골 선수들이 한국 배구의 취약한 저변을 커버해 주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영입이나 과도한 경쟁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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