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눈물로 쓴 편지 주고받던 아내의 시집살이 6개월

중앙일보

입력 2021.05.28 13:00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16)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신혼 시절에 오간 편지를 읽다 보니 아내가 시집와서 살아온 일들이 떠오른다. 결혼하자마자 견우와 직녀처럼 떨어져 6개월간 시집살이하는 동안 사랑과 신뢰가 더욱 돈독해져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난하게 살아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잘 감내해 온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다.

곱디곱던 아내는 60대 중반 손주 둘의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84년 초봄 스물아홉의 총각은 두 살 아래 5남매의 막내인 아내와 9개월간의 연애 겸 탐색 기간을 끝내고 결혼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본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가려고 하자 “네 댁은 두고 혼자 올라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신다. 시집의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무 언질도 없다가 갑자기 말씀하시니 얼떨떨했다. “여태껏 혼자 살았는데 결혼 안 한 셈 치고 당분간 혼자 지내라”고 말씀하시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시집의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아내는 신혼 초 6개월이나 시집살이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이지만 그 당시는 얼마나 힘들고 상심이 컸을 것이다. [사진 pixabay]

시집의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아내는 신혼 초 6개월이나 시집살이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이지만 그 당시는 얼마나 힘들고 상심이 컸을 것이다. [사진 pixabay]

버스 타는 곳까지 마중 나온 아내와 이별하고 돌아서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던 아내가 산설고 낯선 생소한 시집에서 시동생 여섯을 비롯하여 여덟 명의 식구들 틈 속에 외톨이가 되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집에서 하룻밤 자고 떠나보낸 신랑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쓴 편지를 매일 주고받으며 주말이 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이 차가 많아 친정엄마 같은 큰 언니가 같은 동네 지척에 있었지만, 세 끼 식사 준비와 시부모 눈치 보느라 한 번도 찾아 가 보지 못했다. 방위로 근무 중인 시동생 아침밥 준비하느라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으며, 연탄불과 석유풍로 하나로 아홉 명 대식구의 밥과 도시락에 반찬까지 장만해야 했었다. 커다란 양은 솥에 안친 밥이 끓으면 연탄집게를 걸쳐놓고 뜸을 들어야 하는데 삼층밥 짓기가 일쑤였다.

연탄불 갈다 깨트려 조심성이 없다고 꾸중을 듣고는 “왜 조심하지 않았겠어요”라고 억울하다며 하소연하다가 말대꾸한다고 더 혼이나 펑펑 울기도 했단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옷이 상하고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며 손으로 빨래를 해야 했다. 큰 이불 홑청을 빨래하고 풀을 먹이고 살짝 말려 다듬이질해야 하는데 많이 말렸다고 꾸중을 들고는 설움을 삭였다.

어려운 시집살이에도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없이 “오늘은 무를 가지런하게 잘 썰었다고 아버님께 칭찬받았다”라는 등 매일매일 한 일과 듣기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다. 혼자 남겨 두고 온 아내를 걱정하며 상심해 있는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아내의 심정을 왜 모를까 마는 좋은 소식만 적혀 있는 편지를 읽을 때면 가슴이 더 쓰려 왔다. 속 깊은 아내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사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에는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 승차권을 웃돈 주고 구입해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부모 앞에 서면 말 한마디 못하고 기약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중앙포토]

토요일에는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 승차권을 웃돈 주고 구입해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부모 앞에 서면 말 한마디 못하고 기약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중앙포토]

토요일 퇴근 후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 가장 먼저 출발하는 승차권을 웃돈 주고 구입해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또 서울로 올라왔다. 아내를 홀로 두고 떠나오는 신랑이나 혼자 보내야 하는 색시의 심정은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을까?

이런 사정을 들은 직장 선배들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께 말씀드려 당장 데리고 올라오라”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 앞에만 서면 말 한마디 못 하고 기약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이런 남편 믿고 있다가 어느 세월에 서울로 올라갈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결혼하면서 퇴직한 아내는 친척 중에 서울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있어 일자리를 알아보다 직장을 구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그럼 올라가라”고 하여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진정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왜 진작 직장 구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내는 스스로 대견하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이지만 그 당시는 얼마나 힘들고 상심이 컸을까? 부모님께 과단성 있게 말을 못 하는 무심한 남편 때문에 시집살이는 하였지만 번쩍이는 기지를 발휘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한 아내는 발목이 잡혀 정년을 채우고 나서야 퇴직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명절이면 시집에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려도, 애들이 어리거나 아파도 어떻게든지 가야 했다. 평소에도 대구까지 승용차로 가려면 4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아무리 새벽에 출발해도 6~7시간은 걸렸으며, 10시간이 넘게 걸릴 적도 다반사였다.

당직이 걸린 명절에는 임신 7개월의 아내 혼자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시골에 다녀왔다. 그 당시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더라도 돌이켜보니 무심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사진 pxhere]

당직이 걸린 명절에는 임신 7개월의 아내 혼자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시골에 다녀왔다. 그 당시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더라도 돌이켜보니 무심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사진 pxhere]

아들이 3살이던 해 추석에는 당직이 걸렸다. 그 당시는 대부분 시골이 고향이라 귀향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정이 뻔한데 선배들에게 바꿔 달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어렵게 기차표를 구해 임신 7개월의 아내 혼자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서울역에 기차를 태워 주려고 나갔더니 귀성 인파로 인산인해다. 사람이 너무 많아 기차를 타러 나갈 수가 없었다. 겨우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폼으로 갔더니 우리가 타고 갈 기차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다음에 출발하는 차에 무조건 올라탔다. 객차 연결 부분 화장실 맞은편에 작은 공간이 있어 신문지를 깔고 만삭의 아내와 3살 먹은 아들을 앉히고 짐 가방을 놓으니 피난민 못지않게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같으면 사정이 이러하여 못 간다고 했을 텐데 왜 그런 말을 못 했던지? 아내도 무거운 몸으로 아무 불평도 없이 혼자 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당시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더라도 무심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요즈음도 아내와 가끔 옛날 얘기를 주고받으면 “남편이란 사람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며 목청을 높인다. 부모님 앞에서 아내 두둔하는 말 한마디 못하는 줏대 없는 남편이었다. 지혜롭고 이해심 깊은 아내 덕분에 지금까지 무난히 살아온 것 같다. 어려움을 잘 견디어 준 아내를 위해 남은 세월 동안 더욱더 아끼며 사랑해야겠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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