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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조차 손절한 '소주성 설계자' 홍장표의 KDI 영전 [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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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선임됐다. 홍 신임 원장은 ‘소득 증가→소비 증가→기업 이윤 증가→고용 확대→소득 증가’의 선순환을 통해 국가 경제가 성장한다는 일명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의 설계자다. 소주성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다.

홍 신임 원장은 현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등 소주성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다 생산ㆍ소비ㆍ투자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소득 분배 상황이 악화하고, ‘고용 참사’ 통계까지 받아들자 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를 KDI 원장으로 불러 앉힌 건 여러모로 억지 인사다. 첫째, 학자로서 양심 문제다. 소주성이 어떤 이론인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뉴욕대 교수나 S&P 같은 신용평가사, 국내 경제 원로까지 두루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정부 공식 문건에서 소주성 문구가 빠진 지는 꽤 됐다. 최근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조차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잘못됐다”며 등을 돌렸다. 더는 가망이 없다고 보고 손을 떼 ‘손절(損切)’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홍 신임 원장은 소주성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 가도로 가던 중이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꺾였다고 주장했다. “소주성은 5년이고, 10년이고 꾸준하게 추진해야 할 정책”이란 입장이다.

둘째, KDI와 결이 다르다. KDI는 박정희 정부 시절 설립됐다. ‘한강의 기적’이 상징하는 개발경제 시대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인력 대부분이 '성장'을 중시하는 주류 경제학을 연구한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주류 경제학에 근거해 정부 지출 급증에 따른 재정 건전성 악화를 우려하고,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쓴소리를 내 왔다. 글로벌 경제학계에서도 소수인 소주성 학파와 거리가 멀다. 홍 신임 원장이 KDI 원장을 맡을 경우 마찰이 불가피하다.

셋째, KDI 스스로 반대하는 인사다. KDI 내에선 홍 신임 원장이 경제수석→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에 이어 국책연구기관장 자리까지 맡는 걸 두고 정권 임기 말 ‘낙하산’ 인사란 우려가 나온다. 최근엔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KDI 출신 원로 19명이 공동성명을 내고 “전대미문의 정책으로 경제를 파괴하고 민생을 질곡에 빠뜨린, 경제 원론적 통찰력이 부족한 인사”라고 지적했다. KDI 출신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도 “정부조차 실패를 인정하고 더 이상 추진하지 않는 정책의 설계자를 원장으로 앉힌 건 KDI의 사망 선고”라고 꼬집었다. KDI 안팎에서 인정받지 못 하는 수장을 일반이 수긍할 수 있을까.

KDI는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 성장을 이론적ㆍ정책적으로 뒷받침한 국내 최고 싱크탱크다. 정권 성향과 무관하게 연구 자율성을 보장했기에 지금껏 권위를 유지해왔다. 현 정부 들어서도 국책연구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쓴소리를 낸 연구 기관이다.

끝내 소주성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홍 신임 원장이 여러모로 불편한 내용이 담긴 KDI 보고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행여나 한국의 중장기 경제정책을 설계하는 KDI에 자신의 정치색을 입히는 무리수는 두지 않기를 바란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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