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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청년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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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청춘의 반란이 ‘유쾌·상쾌·통쾌’하다. 4·7 서울·부산시장 선거 때만 해도 스쳐 지나가는 ‘젊은층의 보수화 바람’이려니 했는데 예사롭지 않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준석·김웅·김은혜 소장파의 약진 속에는 창조적 파괴를 갈망하는 2030 청춘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진영과 이념, 여야를 뛰어넘어 낡은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마름이 느껴진다.

세상을 바꾼 건 청춘의 저항정신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보낸다고 #좋은 시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Latte is a horse(나 때는 말이야)’ 같은 넋두리를 한마디 해야겠다. 꼰대세대인 필자는 그동안 청춘의 인내심과 소심함을 살짝 경멸했다. 꼰대들은 흙수저 출신이라도 노력하면 출세할 길이 열렸고, 월급만 착실히 모으면 아파트 한 채는 거뜬히 장만했고, 중상층으로의 신분상승이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살았다. 1980~9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장년층에게 그 엄혹한 시간들을 견디게 한 힘은 꿈과 패기였다. 민주화든 산업화든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청춘이 살아있는 사회가 정상이고 발전이 있다.

분노와 저항은 청춘의 특권이다. 그동안 우리 청춘들은 특권을 잊어버린 세대라고 착각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진로인지 참이슬인지 족보도 없는 ‘소주’(소득주도) 성장론이란 환상이 빚어낸 불행을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체념하는 듯했다. 청년층 4명 중 1명이 놀고 있는 실업의 고통에 허덕이고, 비정규직·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기구한 신세인데도 군말이 없었다. 늘어나는 일자리라곤 택배밖에 없는 게 IT 강국의 현주소다.

집에 관한 한 완벽한 벼락거지로 추락했지만 위정자의 무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부동산만큼은 할 말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로 그만이었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통속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에나 존재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류는 그렇다 치고, 운동권 출신이라는 새로운 빽과 인맥이 판치고, 신기득권과 구기득권이 지위와 특권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됐으니 비집고 틀어갈 틈이 사라졌다. 청춘들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집과 암호화폐에 무섭게 달려든다. 적자생존의 정글사회에 적응하는 건가.

벼락거지가 된 것도 억울한데 청춘들을 돈에 눈 먼 속물로 대한다. 해외여행비 1000만원, 전역자 사회출발자금 3000만원, 청년기본자산 5000만원을 내걸고 표를 달라고 한다. 훗날 청춘들이 갚아야 할 돈을 선심 쓰듯 내미는 얕은 수작은 청춘이 깔봄의 대상이 됐음을 의미한다.

같은 땅덩어리에 서 있는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모두가 낯선 이방인이 됐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와 관점만 강제하며 청춘의 상상력을 짓누른다. 상생과 공정이란 겉만 번드르르한 언어의 유희로 현실을 왜곡한다. 생활이 된 반칙과 편법, 거짓과 위선, 내로남불은 불치의 병이 됐다.

이런 대혼란의 책임자들은 청와대와 정부를 나가자마자 교수로 복직하고 기업과 로펌으로 옮겨 전관예우를 챙긴다. 온갖 흠결과 부정투성이의 인물이 “능력 있는 인재”로 둔갑해 장관에 오른다. 고문료로 매달 수천만 원을 받고 2조 원대 펀드 사기를 변호한 인물이 버젓이 검찰총장 후보에 발탁된다. 이게 출세의 표준이다.

지금 청춘들이 보여주는 반항의 몸짓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겁을 상실한 권력 집단을 두렵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 부조리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은 듯하다. 숨 막히고 암울한 구조를 깨지 않으면 빚투·영끌 인생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꾼 건 언제나 청춘의 저항정신이었다. 이 땅에서 4·19혁명, 6·10항쟁을 이끈 건 청춘의 뜨거운 피였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그랬다.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 때 청춘들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며 낡은 체제를 거부했다. 미국의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는 기성 체제를 뒤흔들며 인권과 인종차별, 성 해방 문제를 사회에 던졌다. 92년 전 일제에 대항해 쓴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은 지금도 유효하다.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청춘의 도전이 이번에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하고 주저앉는 건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바다. 그들이 속삭이는 공허한 공감과 위로에 속지 말라. 어느 정치인의 주장처럼 ‘장유유서(長幼有序)’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폄하에 기죽을 필요 없다. 어떤 가정환경 출신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학벌이 좋든 나쁘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정직한 대가를 받는 사회가 결국 온다는 가슴의 외침을 따르라. 청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정치 제도를 줄기차게 요구해야 한다.

부당한 체제에 순종하는 청춘은 죽은 젊음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며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좋은 시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분노하는 청춘들이여, 그대를 응원하는 꼰대들이 많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라.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