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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일본서 30년 살면서 품었던 의문을 씻어준 책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당에 헤딩(57)

책『일본의 굴레』표지. [사진 달항아리]

책『일본의 굴레』표지. [사진 달항아리]

명쾌한 '일본 해설서'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미국 사람이 쓴 책이어서인지 감정이입 없이 읽을 수 있었다. 30년 가까이 일본에 살면서 느끼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일본인은 저자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 살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으로서 이 책을 발굴한 번역 출판자에게 감사한다.

10년 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방사능 오염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늘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의 부흥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은 민주당이었다.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가 중심이 되어 만든 당이었으나, 토지 구입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어 총공격을 받게 된다. 나는 지진이 일어난 지역의 부흥을 위해 전력을 다할 정치가는 지진 피해지인 이와테 현(岩手県) 출신인 오자와 이치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향을 살리려는 정치가보다 더 적격인 사람이 있을까?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끈 다나카 카쿠에(田中角栄)의 애제자인 오자와 이치로라면 엉망진창이 된 지역을 어떻게 부흥시켜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그를 몰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는 정치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왜 일본 정치계 사람들이 오자와 이치로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일본의 굴레』를 읽고 알았다. 그는 기존 권력 계층에게는 위협이었고, 미국의 미움까지 사고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한국과 일본에 있어 미국은 성공해 떵떵거리며 사는 친척 같다'고. 미국은 자신의 원죄를 잊은 건지, 한국과 일본을 가지고 논다. 이쪽을 편들었다 저쪽을 편들었다 한다. 한국과 일본은 그럴 때마다 술렁인다. 최근에 햄버거를 먹었네, 케이크를 먹었네 라고 떠들어 대는 뉴스를 봐도 알만하다. 수다 떨기 위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그 허접한 음식은 왜 가져다 놓았는지. 목을 축일 차 한잔, 물 한잔이면 되지 않나?

몇 년 전 한일 관계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인 친구가 이런 말을 물어왔다. "한국과 일본은 언제쯤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라고. 나는 "적어도 10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하고 대답했다. 최소한 증조부 혹은 조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기. 문제가 되는 역사의 장본인이었던 선조의 영향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만으로 분석하고 점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과거에 죄를 지은 지도층의 자손이 정치계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진정한 반성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느낀다.

'일본의 굴레'의 정점을 찍었던 사람들의 아들과 손주들이 정권에서 멀어지는 날, 일본인은 근현대사를 제대로 뒤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pixabay]

'일본의 굴레'의 정점을 찍었던 사람들의 아들과 손주들이 정권에서 멀어지는 날, 일본인은 근현대사를 제대로 뒤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pixabay]

지인의 아들은 대학에 가서야 일본의 역사와 세계사를 제대로 접하고 절망했다고 한다. '일본이 나빴지'라고 묻는 지인에게 그 아들은 '나쁜 정도가 아니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자기의 나라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정책과 침략 전쟁의 실상과 피해국의 고난을 알게 되었을 때 절망은 깊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라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9월에 있었던 자민당 총리 선거 과정은 참 희한했다. 아베 전 총리는 코로나 사태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병 악화로 사임한다. 7년 8개월이라는 장기집권이었다. 1차 집권 때도 지병 악화로 사임하더니 '또'였다. "아베 총리는 힘든 일만 생기면 잘 빠져나가네요. 아프다니 욕을 할 수도 없고"라고 했더니 일본인 친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더니 힘없이 웃는다. 힘든 일만 생기면 지병 악화로 그만둬야 하는 정치가를 총리로 뽑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니다. 알 수는 있다. 일본의 정치계는 총리가 없어도 돌아가기 때문이다. 파벌이 있고 관료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집권당 내에서 바꾸면 되니까.

아베 전 총리 후임을 정하는 선거는 코로나 사태를 이유로 간략형으로 이루어졌다. 자민당 당원 선거를 생략하고 국회의원과 지역 당 대표에 의한 선거였다. 국민투표로 뽑는 것도 아니고 자민당 당원 선거가 뭐 그리 어렵다고 생략하는지,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위기감은 있는 것 같아 잘 대처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위해 허둥지둥 총리를 뽑았을까. 아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을 위한 선거였다. 그리고 이제는 스가 총리 지지율이 낮다며 다시 아베 전 총리를 소환하려는 움직임까지 있다고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1603년부터 2세기 반이나 이어졌던 토쿠카와 막부도 막을 내렸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3대 가는 부자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민당이 쇠락하는 시대도 오지 않을까? 적어도 파벌의 구도가 바뀌는 시대는 올 것이다. '일본의 굴레'의 정점을 찍었던 사람들의 아들과 손주들이 정권에서 멀어지는 날, 일본인은 근현대사를 제대로 뒤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일자막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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