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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이 나라를 우리 몸에 비유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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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치적 비유 이해하기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픽=신용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그래픽=신용호

비유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비유는 그 비유를 사용하는 사람이 대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준다. 누군가 식물의 비유를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저는 화초 같아요.” 이것은 자신이 생명체라는 것, 동물에 비해 일견 연약한 존재라는 것, 그러나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분·온도·거름 같은 외부환경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런 환경과 보살핌이 없다면 말라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월적 지위 리더가 자원 편취하면 #국민은 한 몸이란 환상 버리게 되듯 #나라를 한 몸으로 느끼게 하려거든 #정치적 각성에 따른 비용 감당해야

비유에 주목하면 모호했던 존재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다. 연인이라는 가까우면서도 모호한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의 연인이 당신의 코를 보며 말한다. “당신 콧구멍, 우주 같아요.” 콧구멍을 우주에 비유했다는 것은 콧구멍이 크고 어둡다는 것, 그리고 연인이 그 어둠 속에서 무한한 깊이와 신비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연인이 당신의 가슴을 보며 말한다. “당신 가슴에 난 털, 난초 같애.” 몇 가닥 나지도 않은 가슴털을 난초에 비유했다는 것은, 그 털들이 묵란(墨蘭, 먹으로 그린 난초 그림)처럼 보인다는 것, 즉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별게 다 좋게 보이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신의 털을 난초에 비유한다? 그것은 참사랑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면 안된다.

마음이란 모호한 존재다.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그 모호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출근길 라디오에서 가곡이 흘러나온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오오….” 호수에 비유된 마음은 아마도 고요할 것이다. 그리고 노를 젓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가 닿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동시에, 노를 서툴게 저으면 다가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칫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마음을 호수가 아니라 매립지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매립지로서 마음이란 기분 나쁜 상대를 묻어 버리는 곳, 혹은 이런저런 기억을 파묻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비유는 알쏭달쏭한 대상을 표현하거나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알쏭달쏭한 정치 언어 중 하나가 ‘공동체’라는 말이다. 광의의 공동체는 정치적·사회적 조직체 일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협의의 공동체는 유기체적 성격을 가진 조직체를 주로 지칭한다. 유기체적 조직이란 파편화된 부분들이 가까스로 모여 있는 조직이 아니라 부분이 전체의 자연스러운 일부인 조직, 밖으로 드러난 명시적인 규약에 의해 가입하고 탈퇴하는 조직이 아니라 내적인 관계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조직, 각 부분의 독립성보다는 부분들의 상호의존성이 두드러지는 조직을 뜻한다.

몸은 대표적인 유기체다. 팔·다리·머리·손톱·발톱·복사뼈·쇄골 등이 어느 날 모여 정관(定款)을 만들고 그 정관에 의거해서 몸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유기체이므로, 신체 각 부분이 계약을 통해 가입하거나, 탈퇴하지 않는다. 어느 날 치아가 빠진다고 해서 치아가 더이상 씹는 노동을 하기 싫어서 계약 해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탈모가 온다고 해서 머리털이 두피의 나라로부터 탈퇴 의사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어르고 달랜다고 해서 머리털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탈모는 유기체로서 몸이 겪는 생명 활동의 일부다.

가족이 유기체적 조직일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가족을 유기체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누군가 회사를, 나라를, 혹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가족에 비유한다면, 그는 해당 조직을 유기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한 가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한 가족입니다!” “인류는 한 가족입니다!” “다투면 안 돼.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유기체 비유를 즐겨 쓰는 조직은 갈등을 당연시하기보다는, 갈등 자체가 조직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예컨대, 유기체적 비유를 자주 쓰는 회사가 노사 갈등을 당연시할 가능성은 작다.

국가에 대해서도 유기체 비유가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른바 정체(政體, body politic)의 비유가 그것이다. 각 집단들은 국가라는 몸을 구성하는 개별 기관들로 상상되었던 것이다. 흔히 중세 유럽에서 이러한 ‘정체’의 비유가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정체의 비유는 널리 사용되어왔다. 이를테면 왕이나 황제를 머리로 보고, 신하를 수족으로 간주하는 신하고굉(臣下股肱)론 역시 정체의 비유 중 하나다. 조선 시대 지식인 최충성(崔忠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국가뿐 아니라 천하 전체를 사람에 비유하기도 했다. “천하는 하나의 사람이다.”(夫天下一人而已.)

정치체를 몸에 비유하는 많은 말들이 다 같은 뜻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일단 몸의 각 부분이 흩어져 있어서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렵듯이, 정치체를 이루는 각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몸의 각 부분이 나머지 부분과 무관하게 제멋대로 굴면 제 기능을 하기 어렵듯이, 정치체를 이루는 각 부분이 상호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면, 몸의 비유를 이용해서 정부나 경영자가 국민이나 사원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정부에게 좋으면 그게 시민 사회에게도 좋은 거고, 부유층에게 좋으면 그게 빈민에게도 좋은 거고, 간부에게 좋으면 그게 말단 직원에게도 좋은 거고, 노인에게 좋으면 그게 청년에게도 좋은 거여. 우리는 한 몸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몸의 비유가 늘 정부나 경영자 측에 유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국민들이 나라를 한 몸으로 느끼게 하고 싶거든, 사원들이 회사를 유기체로 간주하게끔 하려면, 그리고 리더가 유기체의 머리 행세를 하고 싶거든, 그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리더가 자원을 분배하기는커녕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활용해서 자원을 편취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한 몸이라는 환상을 버리기 시작할 것이다. 한 몸은 무슨 얼어 죽을 무슨 한 몸? 내 개인의 권리를 찾아야겠다! 이른바 어떤 정치적 각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머리와 심장이 혈액을 사지 끝까지 보내주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몸은 더이상 유기체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쉽게 담이 걸린다. 남성미를 과시한답시고 중년 남성이 셔츠 윗단추를 풀어헤치고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후진 운전을 하다가는 바로 담이 온다. 노화와 더불어 체력이 저하되면, 후진 운전은커녕 가만히 앉아 사지를 몸에 붙이고 있는 것만도 힘들다. 애써 팔다리를 몸에 부착시키지 않으면 팔다리가 떨어져 바닥에 구를 것 같다. 몸이 몸처럼 느껴지려면, 에너지가 전신에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머리로 자처하는 리더가 몸의 각 부분에 나누어줄 에너지와 자원이 부족하면,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된다. 이제 각자 딴 살림을 차려야겠다는 각성이 시작된다.

그 각성이라는 것도 비용이 따른다. 조직이 대신해주고 있던 역할을 이제 자기 스스로 수행해야 하고, 암묵적 관계를 명시적 계약관계로 바꾸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갈등과 협상을 거쳐 관계의 지속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고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독립을 원한 나머지 회사를 박차고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보라. 독립과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혼자 살아내기 위해서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하소연을 듣게 될 것이다. 지친 프리랜서는 회사 책상에 앉아 멍때리고 있던 옛 시절이 간혹 그리울지도 모른다.

사실 멍때리고 있는 상태는 그 나름 솔깃한 구석이 없지 않다. 매일매일 일에 쫓겨 사는 한국인들에게 멍때리는 상태는 각성 상태만큼이나 유혹적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리곤 했다. 각종 분발과 각성에 지친 사람들이 한강변에 모여, 함께 강물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달콤한 시간을 가졌다. 멍때리는 것은 고도의 훈련을 요구하는 명상과는 다르다. 복식 호흡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저 때려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아름다운 멍을. 정신줄을 적당히 놓은 이 상태는 중독성이 있으니, 사람들은 급기야 각성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린 자기 처지를 한탄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정치적 각성이나 민주주의에도 감당해야 할 비용이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