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가수 꿈 접고 낙향하는 노숙자에게 건넨 카파도닉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2021.05.25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21) 

소설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마음속에 잔잔하게 남는 여운이 장기 숙성을 거친 위스키를 마셨을 때와 비슷하다. 책 제목은 ‘애도하는 사람’.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러 다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가족, 친구, 연인 등 애도해줄 사람이 없는 영혼을 쫓아다니며 애도를 한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을 기억해줘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손님이 영~ 없네요? 뭐하고 계셨어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막 다 읽은 참인데 타이밍이 좋으시네요.”

“무슨 책이요? 전 요즘 일이 바빠서 책에서 손 놓은 지 꽤 됐는데….”

“그냥 소설책입니다. 소설을 좋아해서 자주 읽어요. 손님도 없으니 금상첨화죠.”

그녀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고 오늘은 어떤 위스키를 추천해줄지 고민을 한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젊은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보인다.

서울의 밤. [사진 pixabay]

서울의 밤. [사진 pixabay]

“물수건입니다.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입니다. 그에 어울리는 한 잔을 하고 싶네요."

“서울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는 한 잔이라….좀 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위스키를 고르기가 더 수월할 텐데요… 실례가 아니라면, 왜 오늘을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분 말이 정말이었네요. 여기에 오면 마음속에 담긴 한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거든요.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어요?”

그는 1년 전쯤, 가수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서울에 올라왔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꿈을 위해 학업까지 모두 포기했다. 서울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매일 홍대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가져다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1년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그의 공연은 계속됐다. 그러나 지나가는 몇 사람이 관심을 보였을 뿐, 그에게 좋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나자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 알바를 시작할까 싶다가도, 알바에 쓸 힘을 온전히 노래 부르는데 쏟고 싶었다. 그래서 고시원에서 나와 노숙을 시작했다. 꿈을 향한 열정이 있다면, 노숙하며 바라보는 하늘의 별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성공하면, 그때 빛나던 별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감상에 젖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노숙한지 1개월이 지나자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당장의 배고픔이 열정을 앗아갔다. 그때 서울에 올라온 후 처음으로 집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울었고, 집에 돌아오길 원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부쳐준 30만 원. 그는 곧장 목욕탕에 가 몸을 씻고, 옷을 사 입었다. 내일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고, 남은 돈을 손에 쥐고 바에 온 것이다.

“위스키는 드셔보셨나요?”

“아니요, 한 번도요. 사실 노숙할 때 제 옆에서 자던 분이 여길 소개해줬어요. 그분도 1년 전까지는 잘나가는 사업가였는데, 사업을 망한 뒤로 전 재산을 잃고 집에서 뛰쳐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에는 여기서 위스키도 자주 마셨다더군요. 내일 고향으로 돌아간다니까 저보고 꼭 여길 들르라고 하더라고요. 계속 사양했는데도 만 원을 쥐여줬어요. 그동안 들은 노랫값이라고 하시면서.”

카파도닉 위스키. [사진 김대영]

카파도닉 위스키. [사진 김대영]

백바에서 위스키를 꺼낸다. 글렌 캐런에 한 잔을 담아 그에게 건넨다.

“위스키를 처음 드신다면 좀 강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위스키를 드리고 싶네요. 카파도닉 22년입니다. 도수가 높아서 힘드시면 얼음을 넣거나 물을 타드리겠습니다. 먼저 향을 맡아보세요.”

“아, 향이 정말 좋네요. 꽃밭에 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알코올 향이 좀 센 것 같기도 해요. 이건 몇 도죠? 위스키 도수가 높은 건 알고 있는데…”

“57.2도입니다. 보통 위스키는 40도 이상인데, 이건 그것보다 훨씬 높죠. 하지만 제가 이 위스키를 드리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 맛을 보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위스키를 마신다. 아마 글렌 캐런 잔을 드는 것도 처음이리라. 한 모금을 마신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듯하다가 금세 표정이 펴진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향도 그렇더니 맛도 꽃이 떠오르네요. 굉장히 화사한 느낌이에요. 처음엔 알코올 느낌이 들다가 목을 타고 넘어간 뒤로 깊은 곳에서부터 꽃향기가 밀려옵니다. 꽃을 마신 것만 같아요. 위스키는 처음 마셔봅니다만, 정말 맛이 좋은데요. 굉장히 유명한 위스키인가요? 이 카파도닉이란 위스키.”

“아니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위스키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위스키고요.”

“그래요? 아니 왜 이렇게 맛있는 위스키가 지금은 사라져버린 거죠?”

“카파도닉 증류소는 189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폐쇄와 재개장을 반복하다 2002년에 완전히 폐쇄되었고, 2010년에는 건물까지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증류소가 폐쇄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증류소 이름을 걸고 정식 위스키를 발매한 적이 없습니다. 위스키는 보통 10년, 12년, 18년, 25년 등 오피셜 위스키를 발매하곤 하는데, 이 증류소는 단 한 번도 출시한 적이 없죠. 시바스리갈이라는 위스키를 구성하는 원액 중 하나로 쓰였을 뿐입니다.”

시바스리갈 12년과 하이볼. [사진 김대영]

시바스리갈 12년과 하이볼. [사진 김대영]

“그렇군요. 좀 슬프네요. 이렇게 맛있는데….”

“네, 정말 안타깝죠. 그래도 맛있는 위스키는 누군가 알아보고 이렇게 세상에 나옵니다. 요즘엔 평가가 좋아 꽤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위스키라고 해도 최선을 다해 술을 만든 증류소 직원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할까요? 좋은 건 반드시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게 술이든 사람이든.”

“감사합니다. 오늘 제게 이 술을 주신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사실 고향에 내려가면 꿈은 접고 부모님 가게 이어받는 데만 온 힘을 쏟을 생각이었는데, 조금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열정이란 불씨가 제 안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증류소가 카파도닉과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름마저 완전히 잊힌 증류소가 더 많죠. 하지만, 그 위스키들도 분명히 우리가 마시는 술 어딘가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제 이름을 알리지 않았을 뿐이죠.”

“오늘 해주신 말씀, 마음에 새기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다시 서울에 온다면, 그 날 밤에는 다시 여기에 오겠습니다. 그땐 꼭 이 카파도닉 위스키를 다시 한번 마시고 싶네요.”

“그러시죠. 두 잔 분량은 꼭 남겨놓겠습니다. 여길 소개해준 분과 함께 와주세요. 그분께도 이 위스키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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