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송민순 前 외교부 장관이 말하는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

중앙일보

입력 2021.05.24 17:25

업데이트 2021.05.25 09:18

■ 문재인 정부 외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민족주의 과잉

■ 참여정부, 나름 ‘중심’ 지켜가며 국익 실현 위해 외교했다

■ 일본·호주·인도 참여하는데 우리만 ‘쿼드’ 빠질 이유 있나

■ 美와 반도체 마찰 불가피할 듯, 단단히 각오하고 대비해야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과잉하면 실용적 가치가 밀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과잉하면 실용적 가치가 밀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참여정부 임기 5년 중 2년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참여정부 핵심 인사다. 외교통상부 차관보를 지낸 그는 2006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으로 발탁돼 1년 가까이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이어 그해 12월 제34대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해 2008년 2월 말까지 직(職)을 수행했다.

"원칙의 깃발 세우고 미·중 상대로 같은 목소리 내야"

송 전 장관은 2016년 가을, 북핵 협상 경험을 중심으로 펴낸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로 뉴스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는 책에 “참여정부가 2007년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의결 당시, 기권 결정을 내리기 전 북한에 의견을 물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이에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안보실장이 주재한 회의를 내가 주재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송 전 장관이 잘못 기억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송 전 장관은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책에 써놓은 그대로”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송 전 장관은 참여정부 임기 이후 제18대 국회 비례대표 국회의원,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17년 5월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는 강연과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월간중앙이 참여정부 마지막 외교 ‘컨트롤타워’였던 송 전 장관을 만나 난관에 봉착한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는 5월 12일 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하는 분이 많더라.

“현직에 있었을 때는 눈앞에 있는 걸 자세히 봤다면, 요즘에는 세상을 멀리서 관찰하는 자세로 지낸다. 주로 고전·역사 등을 읽고 있다. 이따금 강연도 하고,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의견을 나눈다.”

외교 전문가들을 만나보면 ‘한국은 실용 외교가 절실한 나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어떤 외교가 실용 외교인가?

“국익을 실현하는 게 실용 외교다. 우리나라의 국가 목표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번영시키는 데 있다. 이런 국가 목표에 도달하려면 이념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목표에 도달할 수단을 만들 수 있다. 그게 실용 외교의 기본이다. 문재인 정부 외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과잉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 외교에서나 민족주의적 성향은 있지만 과하면 실용적 가치가 밀릴 수밖에 없다. 지나친 민족주의나, 반미 혹은 반일, 반중 같은 이념적 정서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도 결국은 실용 접근 아닌가.”

문재인 정부 출범 4년이 지났다. 문 정부의 외교를 평가한다면.

“현 정부 외교의 공과를 현시점에서 단적으로 평가하고 싶진 않다. 외교는 당장이 아닌, 시간이 지난 뒤에 성과가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평가하자면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 정부의 외교는 대부분 한·미 관계와 남북관계에 맞춰졌다. 변칙적인 트럼프 전 미 대통령과 손발을 맞춰 북을 설득하고자 했다. 핵을 없애고 평화체제를 구축해 지속 가능한 남북관계를 만들고, 한반도 경제 공동체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소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다. 그런데 남은 기간 북핵 해결 진전은 물론, 평화체제도 남북관계도 기대하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오히려 후퇴하는 중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트럼프 행정부에서 한·미 관계는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왜냐하면 한·미 동맹은 당장 뭔가를 주고받는, 단순한 거래 관계가 아닌데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동맹이란 위협 인식을 공유하면서 동맹을 통해 위협을 극복하고 공동으로 추구하는 성과도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서는 북한 핵과 중국의 팽창으로부터 오는 위협에 대한 한·미 간 인식이 많이 벌어졌다. 동맹은 위협 인식을 공유하지 못할 때 그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워싱턴에서는 북핵이 위험하다고 보는데 서울에서는 ‘뭐가 위험하냐’는 식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日 우리 편 만들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축에 유리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 대표들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 대표들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차관.

중국과는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때 틀어진 이후 긴장감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

“사드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사드는 북핵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한 것 아닌가. 배치 전에 ‘중국이 북핵 위험을 해소해주지 못하면 사드 배치가 불가피하다’면서 뜨거운 감자를 중국 손에 넘겼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소홀히 하고 사드를 배치하다 보니 사달이 커졌다. 더 큰 문제는 정권 교체 후 2017년 10월 중국에 ‘3불(不)’, 즉 사드 추가 배치 불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 불편입, 그리고 한·미·일 3국 협력의 군사동맹 결성 불가를 중국 측에 약속했다는 점이다. 우리 안보 수단의 선택지를 잘라버린 악수였다. 선택지를 최대한 넓혀놓아야 하는 게 안보다. 안보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경제는 잘 먹느냐 못 먹느냐의 문제다.”

이 정부 들어 대일 관계도 크게 경색됐다.

“도쿄나 서울이나 국내 정치와 외교를 너무 엮어버린 결과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실용 외교를 해야 한다. 일본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한반도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데 유리하다. 한국과 일본의 이견 조율이 잘 이뤄지면 미국을 설득하기도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한·일이 타협했을 때 미국 설득이 용이했던 경험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 대북 정책 기조는 협상·제재·군사태세

2007년 3월 13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무회의에 앞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2007년 3월 13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무회의에 앞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참여정부 때 외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다.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외교를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 4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유독 까다로운 존재인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그래도 참여정부는 우리 입장과 중심을 지키면서 국익 실현을 위한 외교를 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나라의 줏대가 없고 깃발이 표류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

“사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건 이 정부만의 고유한 목표가 아니다. 역대 모든 정부가 같은 정책을 다른 이름으로 추진했다. 문제는 이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스스로 ‘중재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중재자는 자기 자신의 입장보다는 당사자들의 합의나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존재다. ‘우리가 주체’라는 참여정부 때와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일본과의 외교도 그렇다. 그동안 그렇게 강경 입장을 고수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국민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외교에서는 줏대와 일관성이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작업과 관련해 “우리 정부가 바라는 방향과 거의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5월 취임 3주년 기자회견 때 말했던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말고 남북 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자”며 남북, 북·미 관계를 분리하는 듯한 발언과는 배치된다.

“북·미 관계가 너무 답답했으니까 남북관계라도 해소되면 좀 숨통이 트이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기본적인 한반도 구도는 평양-워싱턴이 주축이고, 평양-서울은 하부 개념일 뿐이다. 북한은 그 입장을 절대 바꿀 수 없다. 그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기본 이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가 없는데 남북관계를 따로 진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클린턴·부시·오바마·트럼프 행정부 때와는 다르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예상하나?

“사실 바이든 행정부뿐만 아니라 역대 미국 모든 행정부가 전임 행정부 때와 똑같은 대북 정책을 펴진 않았다. 중요한 건 얼마 전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북 정책 리뷰 완료를 보고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인사들을 보면,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는 협상·제재·군사태세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4월 30일(현지시간)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 안에서 “대북 정책 리뷰가 완료됐다고 확인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101일 만에 대북 정책 리뷰를 마쳤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며 “우리 정책은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 일괄 타결)’을 이루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전략적 인내’에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으로부터 대북 정책 리뷰 완료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미 언론은 보도했다.

북한의 비핵화는 가능할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면서 ‘남쪽은 미국의 핵우산이 있는데 우리는 없으니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만든 핵우산을 걷어내야 한다면 미국의 핵우산도 남쪽에서 걷어내라’고 한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다.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밝혔다. 전략자산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건 유사시 핵을 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한·미 동맹을 단절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안보 지형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가 어렵다는 거다. 이런 연유에서 미국도 한반도의 ‘종국적인’ 비핵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종국적이란 말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비핵화는 요원한 일일까?

“북한이 핵포기의 전제로 요구하는 안전보장 조건을 풀어보면 세 가지다. ▷정치적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와 제재 해제 ▷군사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경제적으로 인프라 건설과 경협 지원.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해서라면 북한이 요구하는 조건을 놓고 과연 어디까지 협상할 수 있는지 바닥까지 가볼 필요는 있다. 가령 ‘북·미 관계 정상화와 제재를 풀고 한·미 동맹도 바꿀 테니 너희도 핵을 완전 폐기하고 북한 전역에 핵무기와 물질이 없다는 걸 검증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는 식이다. 이런 협상을 구체적으로 하려면 굉장한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 아직 그런 정도의 협상은 없었다.”

배탈 나는 음식보다는 맛없는 음식 먹어야

2007년 2월 스페인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송민순 외교부 장관에게 6자 회담 관련 보고를 받고 있다.

2007년 2월 스페인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송민순 외교부 장관에게 6자 회담 관련 보고를 받고 있다.

동맹을 강조하는 바이든 시대, 우리 정부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미국 대외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중국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맹을 규합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도 동맹 중시 자세를 견지하는 게 좋다. 다시 말하지만, 한·미 동맹의 기초는 위협 인식과 가치를 공유하는데 있다. 위협 인식의 대상은 북한의 핵과 중국의 팽창이다. 가치의 기초는 자유·민주·인권·시장경제다. 그 바탕이 단단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미국을 따라 하자는 건 아니다. 우리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 원칙의 깃발을 세우고, 미·중을 상대로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상대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면 나중에 더 어려워진다.”

쿼드(Quad)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가치 체계, 국력 규모, 동맹·우호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호주·인도가 참여하는데 우리가 빠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국이 빠져 있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한국이 지리적으로 너무 중국에 밀착해 있고,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의 자세가 다소 ‘친중·반일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리적 요소는 한국이 이미 미국의 동맹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친중·반일 자세는 다소 현 정권 차원의 성격이라는 점에서 기준이 되기 어렵다. 쿼드에 참여하는 것이 맞다. 배탈 나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그래도 맛없는 음식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기왕 참여할 거라면 준회원이 아닌 정회원이 낫다. 한국이 정회원이냐 준회원이냐로 우리를 대하는 중국의 태도에 별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쿼드란 미국·인도·일본·호주 등 4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비공식 안보회의체다. 2020년 8월 31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이 쿼드를 공식 국제기구로 만들 뜻을 밝힌 데 이어 한국·베트남·뉴질랜드 3개국을 더한 ‘쿼드 플러스’로 확대할 의도를 내비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 대목에서 송 전 장관은 자신이 2006년 초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으로 재직할 때 일화를 들려줬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추진 여부를 놓고 찬반 의견이 거세게 엇갈릴 때였다.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갑자기 불러 한·미 FTA와 관련해서 내 의견을 묻더라. 이에 ‘대통령님, 중국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쏠려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거센 조류에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미국이라는 바닥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라.”

“미국엔 이 말 하고 중국엔 저 말 하는 건 곤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연과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연과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산업을 강조한다. 우리 정부와 마찰 가능성은 없을까?

“현대 산업에서 반도체는 ‘쌀’이다. 미국은 반도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이 분야를 좀 소홀히 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중국의 굴기(屈起)를 막기 위해 반도체 기술 압박을 가하고자 한다.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은 중국과 상당히 커플링(결합)돼 있기 때문에 갑자기 디커플링(분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미 간 약간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부통령이던 2013년 12월 방한했을 때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해서 좋을 거 없다’고 했다. 단단히 각오하고 대비해야 한다.”

격화되는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미국에는 이 말 하고 중국에는 저 말 하는 식은 안 된다. 상대방의 면전에서, 다소 거북하더라도 같은 기조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반대편에 서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원칙에 따른 입장 깃발이 있다’고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중이 ‘한국은 좀 빳빳하지만, 우리한테만 그러는 건 아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왜 한·일 관계가 크게 틀어졌을까?

“기본적으로 서울과 도쿄 모두 국내 정치에 한·일 관계를 너무 깊이 개입시켰다. 특히 이 정부 들어서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로 양국의 관계가 꼬였다. 그런데 설령 전 정부의 잘못이 있었더라도 그건 국내적으로 해결했어야 했다. 회사 하나를 인수해도 채권·채무 다 안듯이, 전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다 인수해서 처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행정부 수반이지만 대외적으로 국가의 총체적 책임을 지는 자리다. 대외관계에서 삼권분립은 방패가 될 수 없다.”

도쿄올림픽이 양국 관계 개선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도쿄올림픽에 공을 들이는 건 김정은이 일본에 오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도쿄올림픽은 위안부·강제징용 등과는 별개 문제다. 한 번 만났다고 갑자기 잘되긴 어렵다. 그래도 바이든 행정부가 일본과 한국에 대해 공히 관계 개선을 독촉하고 있으므로 다소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미국과 일본이 부쩍 가까워진 듯한 모습이다.

“그만큼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숙제는 중국 견제인데, 사실 미국의 곳간이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동맹 규합이 필요한 거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은 물론 한국도 규합해야 중국 견제가 가능해진다. 동시에 일본의 역할이 커지면 한국의 공간이 줄어드는 동북아의 지정학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조공외교’라고 비판했다.

“스가 총리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전부터 일본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일 관계를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뒤 대중, 대러 정책을 펴는 것이었다. 과거 하토야마 총리 시절에는 미국에 너무 치우친 미·일 관계를 바꿔보려 했는데, 시기상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린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 “목적은 미·일 동맹 강화라고 하는데, 조공외교가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꼬집었다.

국내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러시아와의 외교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러시아의 국가 문양은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다. 한쪽은 유럽을, 다른 한쪽은 아시아를 쳐다보는 독수리다. 그런데 지금은 유럽 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만큼 아시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러시아는 4강국 가운데 상대적으로 우리와 마찰이 덜한 나라다. 러시아 극동 개발에 우리 기업은 물론, 정부 차원의 전략적 접근이 지속돼야 한다.”

참여정부 마지막 외교 컨트롤타워였다. 임기 말에는 어떤 외교를 해야 하나?

“정부가 아직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가시적 성과나 이벤트에 매여 있는 듯하다. 지금 여기에 집착할 계제가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임기 말의 정부는 다음 정부가 들어와서 정책을 잘 펴나갈 수 있도록 바닥을 깔아주는 게 중요하다. ‘내가 반드시 하겠다’며 대못을 박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얼마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송민순 전 장관같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인물들로 인사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다. 북한을 설득하려면 미국을 움직이는 입체적인 전략을 써야 한다.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때로 일본도 필요하다. 그런 게 종합적으로 고려되는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

한국 외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 말해달라.

“우리나라는 외교를 하기가 굉장히 힘든 나라다. 한 손으로는 현상을 유지·발전시켜야 하고, 다른 손으로는 현상을 변경해야 한다. 이처럼 한국의 외교는 복합적이면서도 모순적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이 부상하고, 북한이 핵을 보유한 상황에서 미·중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현상 변경보다 유지·발전 쪽에 힘을 더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핵을 가진 북한과 당당히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다. 막연하게 ‘우리 민족끼리 하겠다’고 말할 계제가 아니다. 또 하나, ‘국내 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말이 있다. 정쟁이 국경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거다. 초당적인 외교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우리와 길게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독일은 내각제 정부에서 연립정권들이 정책 지속성을 유지했기에 기회가 왔을 때 통일을 이뤘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외교관은 기계공이 아니라 정원사다. 기계공은 자동차가 몇천 ㎞ 달리면 엔진오일을 갈아야 하고, 또 몇만 ㎞를 달리면 타이어를 교체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있다. 반면 정원사는 기후와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단기적인 기상관측은 물론 장기적인 기후변화도 챙겨야 한다. 한반도에서는 핵을 가진 북한과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등장하고 있고, 범지구적으로는 기후변화, AI(인공지능), 코로나19 백신, 반도체도 모두 외교 영역이 됐다. 외교관에게는 이런 변화하는 환경에 적시에 적응하는 전문적 탄력성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글 최경호·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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