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플] 은퇴한 전설의 투자가 불러낸 기후테크···美산불이 판 키웠다

중앙일보

입력 2021.05.24 05:00

업데이트 2021.05.24 09:33

지난 2월, 전설의 실리콘밸리 투자자 크리스 사카가 투자업계에 복귀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우버의 엔젤투자자로 유명한 그는 4년 전 '더이상 스타트업 투자에 가슴 뛰지 않는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랬던 그를 다시 불러낸 건 기후테크(Climate Technology ⋅ CT)다. 그는 기후테크 투자전문 벤처캐피탈(VC)을 만들고는 “15년 전, 스타트업들이 코드 몇 줄로 시장을 뒤흔들던 때 같은 혁신이 지금 기후테크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블로그에서 밝혔다.

팩플인터뷰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임팩트투자사 옐로우독의 제현주 대표는 “내 말이 그 말”이라고 했다. “앞서가는 기업과 자본은 기후위기를 거대한 투자 기회로 보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옐로우독도 현재 100% 민간 자금으로 ‘기후테크 투자펀드’를 조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투자은행 크레딧스위스, 사모펀드 칼라일 등에서 일한 그는 자본이 선의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PwC)에 따르면, 2013년 이후 7년간 연간 기후테크에 유입된 벤처자금은 매년 84%씩 늘었다(누적 595억달러). 같은 기간 전세계 VC 시장 성장률의 5배다. 지난달 30일 서울 성수동 옐로우독 사무실에서 제 대표를 만났다.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사진=옐로우독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사진=옐로우독

실리콘밸리가 움직이는, 기후테크

’왜 지금’ 기후테크인가?
기후테크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산업을 ‘탄소’라는 렌즈로 다시 들여다볼 때 필요한 기술이다. 2050년까지 넷제로(Net Zero), 즉 배출한 탄소를 모두 제거해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기로 한 195개국의 선언(IPCC, 2018년)이 ‘새로운 표준’이 됐다. 당장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로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10여년 전에도 ‘클린테크’ 투자가 반짝 유행했다. 이번엔 다를까.
클린테크는 ‘깨끗한 에너지’ 기술에 국한됐다. 하지만 에너지 분야는 인간이 배출하는 총 탄소(연간 510억톤)의 3분의 1일 뿐이어서 에너지만으론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 특정 산업이나 섹터가 아닌 모든 시장이 다 바뀌어야 한다는 걸 우리 모두 안다. 특히 이번엔 북반구 중위도에 위치한 선진국들이 기후변화 위기를 몸으로 체감하면서,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지난해 한달 넘게 이어진 산불의 영향이 컸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은 왜?
인간은 보이는 자극에 훨씬 강하게 반응한다. 북극 빙하가 녹은지 오래고, 적도 국가들이 자연재해를 꾸준히 입었지만 북반구 중위도에 사는 선진국들은 기후위기를 진짜로 체감하진 못했다. 그런데 최근 재앙 수준의 산불을 장기간 경험하고 달라졌다. 기술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미국 서부의 창업자와 자본가들이 공격적으로 기후테크에 투자하고 있다. 
2020년 가을 미국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일어난 산불은 30만 에이커 이상을 불태웠다. 미국 IT 기업들과 벤처투자사가 밀집한 샌프란시스코 일대는 산불 이후 연기로 뒤덮여 대낮에도 어둠이 지속됐다. 통신사 AFP는 오렌지 스모크로 뒤덮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담은 사진을 '2020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했다. 사진 연합뉴스=AFP

2020년 가을 미국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일어난 산불은 30만 에이커 이상을 불태웠다. 미국 IT 기업들과 벤처투자사가 밀집한 샌프란시스코 일대는 산불 이후 연기로 뒤덮여 대낮에도 어둠이 지속됐다. 통신사 AFP는 오렌지 스모크로 뒤덮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담은 사진을 '2020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했다. 사진 연합뉴스=AFP

IT처럼, 기후테크(CT)도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건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크면 시장도 크다. 실리콘밸리에는 위기를 기회로 잡는 방법을 잘 아는 이들이 모여있다. 국가적으로는 규제나 인센티브처럼 ‘탈탄소 매커니즘’을 빨리 만드는 곳에서 기후테크 솔루션에 앞설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캘리포니아가 가장 빠르다. 기후기술이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 기술을 갖고 있고, 소비자들도 탈탄소 솔루션에 대한 비용 즉 ‘그린 프리미엄’을 자기 주머니로 지불하려는 의지가 높다. 이런게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미국 서부에 기후테크 생태계가 두터워지고 있다. 
탈탄소 규제나 인센티브가 너무 빨리 도입되면 기존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우려도 있다.
우려할 수는 있지만, 그런 제도를 유예할수록 탈탄소 솔루션을 개발할 새로운 기업이 탄생할 토양도 약해진다. 기존 기업도 보호하려고만 하면 글로벌 탈탄소 경쟁에서 한국 전체가 뒤쳐진다. 한국의 기후테크 생태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이 기술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식품이나 철강⋅시멘트 등 다른 시장에서는 어떤 기술로 어떻게 탈탄소 시장을 공략할 것인지 도전하는 과정에서 기회가 생긴다. 
‘기후테크 스타트업’ 많은 곳 살펴보니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기후테크 스타트업’ 많은 곳 살펴보니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자본이 요구하는, 탈탄소 경제

글로벌 자본시장 역시 매년 ‘탈탄소’, ‘기후위기’를 투자의 핵심 기준으로 내세우고 강조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 래리 핑크 회장은 올해초에도 기업들에 연례서한을 보내 “넷제로 경제에 어떻게 대비할지 계획을 공개하고, 해당 계획이 기업의 장기적 전략에 반영됐는지, 이사회는 이를 어떻게 검토했는지 공시해달라”고 요구했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압박이다.

자본시장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리스크 관리. 블랙록이 투자한 기업들이 기후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블랙록의 투자 수익률이 위험해진다. 전세계 모든 산업의 표준이 ‘넷제로’ 기준으로 바뀔텐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게 분명하니까. 둘째로는, 그런 기업들이 고객이 될 탈탄소 솔루션 시장을 자본시장은 주목하고 있다. 전에 없던 거대한 시장이 새로 생긴다. 각 기업이 이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지 준비하라는 메시지다.
한국 기업들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한 곳이 많은데. 
대기업들 만나보면, 최대주주 혹은 2대 주주가 블랙록이나 국민연금이라면서  ‘ESG가 도대체 뭐냐’, ‘ESG를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물어본다. 그렇지만 ESG 전담 조직 하나 만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ESG를 자신의 핵심 아젠다로 챙겨야 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ESG가 뭐길래, 왜 이렇게 중요해졌나.
전세계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주도하는 흐름이다. 국민연금이나 블랙록은 자신들에게 자산을 맡긴 자산소유주의 이익을 위해 ESG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연금을 맡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선 투자기업이 큰 기복 없이 성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이 사회와 환경의 문제를 고려하고, 가장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배구조를 갖는 ESG 경영을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재밌는 건, 코로나19도 이런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는 거다. 지속가능성을 중시한 투자가 코로나19 이후 회복탄력성이 더 좋았다.

기후테크 유니콘의 조건

옐로우독은 2017년 출범후 1200억원을 운용하고 있다. VC로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기존 시장과 사회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한 환경·사회적 문제를 혁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임팩트 투자사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제 대표는 “앞으로는 기후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를 옐로우독의 최우선 투자 영역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벤처투자사로서 배팅할 만한 엄청난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면서.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사진=옐로우독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사진=옐로우독

기후테크에서 옐로우독의 역할은?
전통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탈탄소경제로 전환을 모색해야 하지만,  그 일은 오래 걸린다.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기업이 오히려 더 쉬울 수 있다. 테슬라나 올버즈(자연유래 소재로 만든 신발) 같은 신생 기업들이 그걸 보여줬다. 이때 필요한 게 자본이다. 이들의 시도에 믿고 돈을 걸어주는 자본이 있다면 기업이 빨리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의 기후테크 생태계는 어떤 수준인가.
규제, 자본, 소비자. 이 셋이 잘 맞물려진 곳에서 생태계가 커진다. 한국은 아직 초기 진입 단계다. 해외에선 이미 기후테크로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 이상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기업들이 많다(※PwC에 따르면 2019년말 기준 글로벌 기후테크 유니콘은 43개). 3~4년 전만해도 ‘테슬라, 저게 되겠어?’했지만 지금 어떤가. 대체육 기술을 보유한 '비욘드미트'나 '임파서블푸드', 주거용 태양광 '썬런', 종자기술 '인디고' 같은 기업들이 이미 유니콘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국내 대체육 스타트업 지구인컴퍼니(브랜드명 언리미트)만 해도 해외매출 비중이 국내보다 더 클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옐로우독이 투자한 기후테크의 60%는 해외 기업이다. 국내엔 투자할 곳이 적어서?  
해외의 유망한 기후테크 솔루션이 한국이나 아시아 기업들에 도입돼 지구 전체의 탈탄소 효과를 높이는 것도 임팩트투자사로서 중요한 역할이다. 한국 기업과 해외 기후테크 기업을 잇는 일도 중요하고. 다만 현실적으로는 한국에 아직 투자할 만한 기후테크 기업이 충분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매년 늘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젊고 전도 유망한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새로 열리는 이 시장에 도전하면 좋겠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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