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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선

'5월 광주'를 누가 훼손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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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최근 페이스북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을 나란히 올린 뒤 “윤 전 총장이 5ㆍ18을 언급하니, 젊은 시절 전두환 장군이 떠오른다”고 썼다. 세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 전두환의 12ㆍ12와 5ㆍ17(비상계엄 전국 확대)을 2단계 쿠데타로 지칭하면서 윤 전 총장의 조국 수사와 대권 도전이 이를 닮았고, 둘째 육사 성적이 하위권이거나 사법고시 9수를 했지만,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으며, 셋째 보수 언론(조선일보)의 지원을 받았다는 거다. 이 포스팅을 두고 온라인에선 “전두환의 재발견”이라며 비꼬는 반응도 적지 않다. 윤 전 총장을 악마화시키기 위해 ‘윤석열=전두환’ 논리에 억지 근거를 갖다 붙인 이가 한때 신망받던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든다. 하긴 “조국, 예수 길 걷고 있다”(황교익)는 이들의 정신세계니 무슨 말인들 못 할까.

윤석열 5·18 메시지에 여권 발끈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어선 안돼 #보수 초청은 국가 통합의 출발점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안 질의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안 질의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김의겸 의원뿐이 아니다. “5ㆍ18은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정신이다. 어떠한 형태의 독재나 전제든 이에 강력한 거부와 저항을 명령하는 것이다. 5ㆍ18 정신을 선택적으로 써먹고 던지면 안 된다”는 윤 전 총장의 5ㆍ18 메시지를 두고 여권은 발끈했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검찰주의자가 민주주의를 말하다니 여름에 솜바지 입고 장에 가는 꼴”이라고 했고, 김남국 의원은 “정치검찰이 무슨 낯으로 5ㆍ18 정신을 운운하는가”라고 했다.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독재에 대해 아는 체하며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신동근 의원)라거나 “(윤 전 총장이) 검찰총장과 검찰을 자기 정치에 이용했듯, 5·18 광주도 자기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다”(김두관 의원)는 지적도 나왔다. 한마디로 "어딜 감히"라는 반감이다.

윤 전 총장이 야권 유력 대선 주자이기에 여태 여권의 공세는 거셌지만, 이런 집단 히스테리는 이례적이다. 왜 이럴까. 아픈 데를 찔려서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해서다. 자신들 권력 유지를 위해 전리품처럼 써먹던 상징 자본이 자칫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해서다.

2019년 2월 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지만원씨가 참석하고 있다. 지 씨는 공청회에서 5.18 북한군 개입 여부와 관련해 발표했다. [연합뉴스]

2019년 2월 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지만원씨가 참석하고 있다. 지 씨는 공청회에서 5.18 북한군 개입 여부와 관련해 발표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남한 사회를 관통해 온 정치적ㆍ지역적ㆍ이념적 구도는 영남-보수 대 호남-진보였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는 두 세력을 수평적 대립 구도가 아닌 가해-피해의 관계로 만들었다. 비록 보수 정권인 김영삼 정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처벌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 등을 제정해 명예회복과 제도화에 나섰지만, 상흔을 온전히 치유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 와중에 진보진영은 진상규명을 반복해 요구하며 5ㆍ18을 1980년에 박제화시켰고, 보수진영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며 폄훼했다.

특히 가해자의 ‘켕김’이 있기에 보수는 5ㆍ18 자체를 썩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5ㆍ18에 소극적이거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딴지를 걸었다. 다소 진일보한 행태가 광주를 찾아 무릎 꿇고 사죄(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하는 것이었지만, 이 역시 ‘가해자 프레임’에 머물렀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7일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를 방문해 반도체 물리학자인 고(故)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7일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를 방문해 반도체 물리학자인 고(故) 강대원 박사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윤 전 총장은 5ㆍ18의 보편성에 주목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연성 독재’ 행태를 보이는 현 정부를 직격했다. 5ㆍ18로 문재인 정권을 때린 것이다. 이런 과감함은 단순한 정치 공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윤 전 총장 본인이 기존 보수 진영으로부터 빚진 게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서울 법대 재학시절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 사형을 구형한 이력도 작용했을 듯싶다. 이념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윤석열식 정치'의 일단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트럭에 근조 깃발을 달고 이동하는 광주 시민들. [국가기록원 제공. 연합뉴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트럭에 근조 깃발을 달고 이동하는 광주 시민들. [국가기록원 제공. 연합뉴스]

1980년 광주의 외침은 이랬다.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민주회복. 파격적이거나 전복적인 주장이 아니었다. 비록 군부에 의해 진압돼 미완에 그쳤지만 5ㆍ18이 있기에 6ㆍ10 시민항쟁도, 87년 체제의 6공화국도 가능했다.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데 5ㆍ18은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미국 배후설이나 북한 개입설 등은 5ㆍ18의 사실을 곡해한 양극단의 오독이었다. 그렇다해도 지난해 민주당이 통과시킨 5ㆍ18 왜곡 처벌법은 외려 5ㆍ18의 본령을 침해하는 퇴행이었다. 다행히 5ㆍ18 민주유공자유족회의는 올해 처음 보수정당(국민의힘)을 추모제에 공식 초청했다. 숱한 왜곡을 뚫고 40여년 만에 비로소 5ㆍ18이 진영을 넘은 국민 공통의 기억이 돼가고 있다. 5ㆍ18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다.

최민우 정치에디터choi.minwoo@joongang.co.kr

최민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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