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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앞선 트럼프엔 꿈쩍않던 文, '행동파' 바이든에 움직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1일 오후(현지시간)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공동 기자회견장. 미국 기자가 문 대통령에게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 대만과 관련, 더 강한 입장을 취하라고 압박했느냐”고 물었다. 문 대통령은 “다행스럽게도 그런 압박은 없었다”고 답했다. 반 농담 같기도 한 ‘다행스럽게도’라는 표현은 미ㆍ중 사이에서 쉽지 않은 한국의 위치 선정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21일 한ㆍ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전략적 무게추, 미국 쪽으로 움직여 #대만해협, 코로나19 기원 조사 등 #중국 불편한 소재서 "한ㆍ미 생각 같아" #일관된 후속조치 없을땐 역효과 우려도

더 눈길을 끈 건 바이든 대통령의 바디 랭기지였다. “well, fortunately, there wasn’t such pressure”라는 문 대통령 답변의 영어 통역이 이어피스로 나오자 바이든 대통령은 헛웃음을 짓는 듯하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곧이어 문 대통령이 “다만(but)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는 인식을 함께 했다(we agreed)”고 말하자, 표정을 바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연이어 끄덕였다.

이 표정의 의미는 곧이어 나온 공동성명에서 확인됐다. 한ㆍ미 간 논의 결과물에 처음으로 대만 문제가 포함되는 등 미ㆍ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온 한국의 무게추가 미국 편으로 기울고 있는 조짐이 포착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소인수 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소인수 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대만 문제는 중국이 핵심 이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중국은 군용기를 대거 동원해 대만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하고, 미국은 대만 해협에 거의 매달 해군 함정을 통과시키는 등 군사적 긴장도 높다. 이런 전략적 대립의 공간에서 한국이 미국과 입장을 같이 한 것이다.

미ㆍ중 간에 가장 첨예한 경쟁이 벌어지는 반도체 등 신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은 미국에 밀착했다. 대기업들의 대규모 대미 현지 투자는 물론이고, 공동성명에서도 “우리는 공동의 안보ㆍ번영 증진을 위해 핵심ㆍ신흥 기술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명시했다.

이 밖에도 공동성명 곳곳에 중국이 아프게 받아들일 요소들이 숨어 있다. “우리는 세계보건기구(WHO)를 강화하고 개혁하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고 돼 있는데, 이는 코로나19 사태 초기 때 WHO가 중국 편향적 태도를 보인 것과 무관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WHO의 독립성 훼손을 이유로 탈퇴까지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뒤 다시 WHO에 가입했는데, 대신 ‘WHO 개혁’을 내걸고 친중성을 뜯어고치겠다고 벼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뉴스1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코로나19 발병의 기원에 대한 투명하고 독립적인 평가ㆍ분석 및 미래에 발병할 기원 불명의 유행병에 대한 조사를 지원할 것”이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코로나19가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원했을 가능성을 부인해왔다. 호주가 코로나19 기원 조사를 촉구하자 중국은 호주산 보리, 와인 등에 관세 보복까지 하고 있다.

미국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지난 3월 WHO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우한 발원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자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원에 대한 간섭이나 부당한 영향을 배제한 투명하고 독립된 분석과 평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중국 당국이 자료 제출을 투명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과 WHO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 등을 문제삼은 것이다.
한ㆍ미 공동성명에 ‘코로나19 기원에 대한 투명하고 독립적인 조사 지원’이란 문구가 들어간 게 의미심장한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사실 표현만 놓고 보면 공동성명상 문안은 매우 당연하고 상식적이다. 대만 해협의 평화가 중요하고, 코로나19 기원을 정확히 조사해 향후 감염병 유행에 대비하자는 것을 비판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게 바로 바이든 행정부 대중 정책의 핵심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뜻을 함께하는 동맹과 우방을 규합해, 이런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응하자는 것이다.

한ㆍ미 정상회담 공동성명도 이런 원칙에 기초했다. 서문에서부터 “한국과 미국은 국내외에서 민주적 규범, 인권과 법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지역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바이든식 ‘가치외교’에 대한 지지인 셈이다.

사실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시작됐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 훨씬 조직적이고 정교하게 이뤄진다. 쿼드(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 간 협의체)만 하더라도 중국 견제용으로 개념을 띄운 건 트럼프 대통령이었지만, 정상급 협의체로 격상시켜 이를 내실화하고 있는 건 바이든 대통령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캠프 데이비드로 향하기 위해 백악관을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캠프 데이비드로 향하기 위해 백악관을 나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시대의 중국 대응이 관세 부과 등을 이용한 임시방편적 압박이었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이 훼손해놓은 국제질서를 아예 다시 쓰겠다는 입장”이라며 “미국 중심의 규범을 세우고, 중국이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배제해버릴 수도 있다는 게 바이든식 접근법”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이 앞서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역시 미ㆍ중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전략적 모호성 유지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한국이 ‘진실의 순간’에 직면했음을 시인한 결과라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전략적 모호성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과 별개로, 현실적으로는 더는 이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 조정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확인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방미 일정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에서 공군1호기에 탑승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뉴스1

방미 일정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에서 공군1호기에 탑승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뉴스1

일단 핸들을 움직인 이상 중요한 건 일관된 후속 조치라는 지적도 나온다. 말로만 무게추를 미국 쪽으로 옮기고 실제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역효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김재신 전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회담을 통해 약속한 내용의 후속조치를 확실히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반도체 협력 등도 약속의 현실화 측면에서 꾸준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워싱턴=공동취재단, 서울=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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