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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영화관 팔걸이, 내것일까 완충지대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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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93) 

시외버스의 가장 앞 1번 자리는 시야가 트이고 넓어서 편한 자리다. 그런데 오늘은 출발부터 도착까지, 이 자리가 아주 힘들었다. 터미널에서 출발하려고 문을 닫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기사는 왜 늦게 타냐며 버럭 화냈다. 다른 곳에서 기다렸다고 하자 또다시 큰 소리로 타박하더니 “짜증 나게…”로 끝맺었다.

4시 25분 차였고, 버스 안의 시계나 내 스마트폰으로는 정확히 25분이었다. 25분 차는 25분 00초 00에 출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25분 59초 99까지 승객에게 탈 권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운송약관에 규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실생활에서 따져본 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다퉈본 적도 없다.

기사는 뭔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원래 성격인지 모르겠다. 운전 중에 내 옆 좌석(3번)을 돌아보며 “어이, 아가씨. 거기 발!” 하길래 보니, 발을 뻗어 앞의 아이스박스 하단에 댔나 보다. 별 잘못도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안된다고 하니 발을 뗐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꽤 언짢았을 말투였다.

버스의 1번 자리는 시야도 트이고 넓어서 편안하지만 그날은 운전자가 보인 위압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 때문에 내내 불안하고 불편했다. (글 내용과 관련 없는 사진.) [사진 박헌정]

버스의 1번 자리는 시야도 트이고 넓어서 편안하지만 그날은 운전자가 보인 위압적이고 신경질적인 태도 때문에 내내 불안하고 불편했다. (글 내용과 관련 없는 사진.) [사진 박헌정]

또 아까 늦게 탄 할아버지가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사 와서 먹는데 차 안에서 취식은 안 된다며 엄하게 꾸짖었다. 코로나 때문에 필요한 지침이지만 말투는 역시 공격적이었다. 시 외곽에 한 번 정차할 때는 어떤 사람이 내리자 “표를 여기로 끊었어야죠!” 하며 또 야단치고, 사라진 후에도 한참 더 욕을 해댄다. 보통 종점까지 끊고 시 초입에서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데 원칙을 꽤 중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1번 자리에서 가만히 봤더니 그 자신도 별로 원칙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휴게소에서 15분 정차한다고 해놓고 12분 만에 출발했고, 시내 구간에서 보행자 신호를 두 번이나 통과했고, 운전 중에 사적인 전화를 계속해댔다.

남의 일을 지켜보다가 너무하다 싶으면 참견한 적도 있고 그러다 목소리 높인 적도 있지만 이건 끼어들 수도 없고 기분만 묘하게 나빴다. 아마 괄괄하거나 쉽게 흥분하는 사람 같으면 “거 적당히 합시다”로 시작해 시비가 붙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승객들이 저지른 잘못보다 훨씬 명확한 위반도 많다. 헬멧 안 쓰고 자전거를 타거나, 길에 가게 물건을 내놓거나, 황색 실선에 차를 세우거나, 임산부석에 맨몸으로 앉거나, 유료 사이트 아이디를 공유하거나, 심지어 재활용 분리수거 할 때까지….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경우 또는 민폐와 위반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반칙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을 욕하다 보면 그 주체는 남이 아닌 평소의 ‘나’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웬만한 고사성어보다 훨씬 정확하게 인간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사자성어가 등장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때로는 시비를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히 어떤 영향이 있거나 민도로 정해지겠지만, 개인으로서는 못 본 척해도 별문제 없으니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마음속에 어느 정도 여백을 두고 살아가고, 허용이 가능한 적당한 선을 알고 있고, 그 선을 넘어가면 스스로 깨닫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것을 모르는 맹견한테 “마스크 안 쓴 사람은 물어!”라고 교육한다면 세상은 큰일 날 것이다.

예전에 어느 강사가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집과 집 사이의 담장 위는 누구 땅인가? 땅 한 뼘이 아쉬운 도시에서 벽돌 한장만큼의 면적은 중요하다. 정답은 ‘누구 것도 아니고, 누구 것인지 따질 목적물도 없다’ 다. 공리(公理)인 것이다. 경계가 되는 선은 가상의 개념이고 그 두께는 0에 수렴한다. 그러니 담장 위의 한 뼘 공간에서는 우리 고양이가 졸고 있어도 되고 옆집 할머니가 굴비를 말려도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담 자체의 소유권은 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위반과 민폐가 많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그 행위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시비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남의 이익을 크게 침범하지 않고, 그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사진 박헌정]

세상에는 크고 작은 위반과 민폐가 많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그 행위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시비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남의 이익을 크게 침범하지 않고, 그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사진 박헌정]

주차구획선도 그렇다. 바퀴가 그 두툼한 선의 정 가운데를 살짝 넘어갈 수 있다. 내 권리일지, 옆 차에 대한 공격일지 따져볼 것 없이 내가 운전을 잘한다면 조금 여유 있게 남겨주면 초보운전자가 애먹지 않아도 되고 ‘문콕’도 방지할 수 있다. 극장 팔걸이도 그렇고, ‘25분 출발’도 그렇다. 완충지대로 두면 서로 평화롭고,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서로 피곤하다.

책이나 문서의 여백은 조금의 오차도 없다. 사람 마음의 여백도 그렇게 일정하다면 세상은 두부 썬 듯이 아주 반듯해질까? 사람에 따라 마음의 여백이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한 사람 안에서도 여백의 크기가 바뀐다. 기분 좋아 너그러워지면 여백도 넓어지고 눈이 세모꼴이 될 때면 까칠하고 쩨쩨하고 야박해진다.

그래도 대부분 어느 정도 경계 범위는 설정하고 사는데, 그 버스 기사처럼 여백을 두지 않는다면 너도나도 숨 쉬며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불편한 느낌은 이미 무뎌졌고 그를 콕 집어 탓하려는 게 아니다. 친절이나 서비스 개념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동안 만났던 기사들은 동네 이웃처럼 얼마나 정겹던가.

정확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늘 완벽할 수는 없기에 어느 정도의 허용범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범위는 공평해야 한다. 늘 자기한테만 최대로 적용하고, 두꺼운 흰색 페인트선 가장 바깥쪽만 항상 고집한다면 목소리 큰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날 괜히 남의 일에 눈과 귀가 쏠려 종일토록 마음 불편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는 나에게만 너그럽지는 않은지’ 한번 자문해보는 의미가 있었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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