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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느리게 산다…IQ 편견과 싸우는 '한국판 검프' 2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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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라마 카페에 경계선 지능 청년들이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석예슬 인턴

아자라마 카페에 경계선 지능 청년들이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석예슬 인턴

“악동들이 힘을 합쳐서 '빌런'(villain, 악당)을 무찌른 영화 내용처럼, 저희(외계인)도 세상(지구인)과 맞선다는 의미에서 ‘가디언(guardian)’이라고 불러요.”(최원재씨)

빌런을 무찌르는 영웅, '가디언'은 영화에만 있지 않습니다. 세상 곳곳에 있죠. 이들의 평소 모습은 남들과 조금 다르고, 눈에 더 잘 띕니다.

[밀실]<제69화> #경계선 지능인 이야기

학교나 직장에서 의사소통이 서투르거나 학습이 어려운 사람들을 만난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행동이 어딘가 굼뜨고 어색해 답답하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편견과 맞서 싸우는 가디언들입니다. 대부분 71~84 사이의 지능지수(IQ)를 가진 ‘느린 학습자(slow learner, 경계선 지능)’인거죠.

느린 학습자는 말 그대로 경계선에 서 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중간 어디쯤이죠. 1994년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도 경계선 지능을 가진 주인공, 검프의 인생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밀실팀은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두 명의 가디언, 한국판 검프들을 만났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 경계선 지능을 말하는 모습이다. [영화 장면 캡쳐]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 경계선 지능을 말하는 모습이다. [영화 장면 캡쳐]

학교폭력·따돌림당하는 느린 학습자

“초등학교 3학년 때, 동급생들한테 놀림 받고 따돌림도 당했어요. 당시에 저는 기분이 제어가 안 되면 물건을 던지거나 발로 뭔가를 찬다거나 격하게 표현했었고요.”
서울경계청년지원센터(이하 센터) 산하 아자라마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최원재(26)씨.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자라마’는 영어 문장 ‘Would you love me?(날 사랑해줄래)’의 초성을 따서 한글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느린 학습자들의 소망이 담긴 카페인 거죠.

경계선 지능인 사람은 적절한 상황 판단이 어렵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다 보니,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모든 행동에 IQ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쉽게 학교폭력이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느린 학습자 배규하 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석예슬 인턴

느린 학습자 배규하 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석예슬 인턴

'불안과 혼란의 시기.' 센터 산하 별빛책방에서 근무하는 배규하(27)씨도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 그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워 답답한 마음이 있었고, 이대로 살기 싫은데 억지로 살아야 한다는 피해 의식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14%, 7명 중 1명꼴. 생각보다 많은 이가 경계선 지능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 교실당 1~3명의 느린 학습자가 있지만, 대부분은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학교 생활을 마치곤 합니다.

“시간 조금만 주면 자립할 수 있죠”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혼자 개척해야 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편견과 싸웠던 교문을 나서면 더 큰 고비가 찾아옵니다. 냉혹한 사회의 문이죠. 최원재씨도 졸업 후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막막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지적장애 진단 기준인 IQ 70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느린 학습자들은 현행법상 장애인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장애인 채용에 따른 인센티브가 기업에 주어지지 않다 보니, 적응이 느리고 빠릿빠릿하게 일하기 어려운 이들의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어찌 보면 장애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 거죠.

최원재씨는 운 좋게 센터의 도움을 받아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취업은 또 다른 고비의 시작이었답니다. 그가 일하는 걸 처음부터 지켜본 카페 매니저 A씨는 “손님들이 계산 잘못됐다고 따지거나 음료 주문이 밀리는 등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당황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최씨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반복 훈련과 동료 직원의 조언 등 1년 넘는 노력 끝에 홀로서기에 성공했습니다. 혼자서 카페를 열고 마감도 할 수 있는 어엿한 바리스타로 거듭났습니다. 배규하씨는 “느린 학습자는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느린 것뿐”이라며 “충분한 시간을 주면 책임감 있게 일을 해낸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합니다.

느린 학습자들을 도와줄 제도도 조금씩 싹을 틔워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서울시는 지자체 중 처음으로 경계선 지능을 가진 학생이나 청년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했는데요. 박현동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장은 "서울 뿐 아니라 다른 시군구에서 비슷한 조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자라마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을 하고 있는 최원재 씨. 석예슬 인턴

아자라마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을 하고 있는 최원재 씨. 석예슬 인턴

“부끄럽다는 생각 말고 도움 요청해야”

제도만 바꾼다고 될까요. 전문가들은 느린 학습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터 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박현동 관장은 “부모도 아이의 경계선 지능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말고, 조기 발견을 통해 느린 학습자에게 맞는 교육을 빨리 시켜야 한다”고 지적하더군요.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느린 학습자가 성인이 되면, 사기의 표적이 되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편견의 빌런과 맞서 싸우는 가디언들도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려 노력해야 합니다. 밀실팀이 만난 두 명의 느린 학습자들은 나부터 사랑하라고, 그리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걸 주저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자기 자신을 도우면 좋겠어요. 도움을 청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자기다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잖아요." (배규하씨)

"월드클래스 그룹 방탄소년단(BTS)도 자기 자신을 강조하잖아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인생의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서 자신을 사랑하면 좋겠어요." (최원재씨)

유독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 사회. 잠시 멈춰 서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느린 학습자들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몇 년 뒤 새로운 역주행 사례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백희연·박건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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