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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남의 집 된장국 냄새 맡다가 불꺼진 집에 갔던 어린 시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52)

오월이 되자 매일 오색풍선처럼 부풀던 꽃들이 땅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여름 피는 꽃이야 종류가 얼마나 되랴. 새봄에 솟아나 피는 꽃들은 모든 색들의 향연 아닌가. 사람도 하루의 사이클을 보면 아침에 봄꽃처럼 절정을 이루다 시간이 갈수록 시드는 수순을 밟는다. 하루 중 가장 지치는 때는 오후이고 저녁이다. 태양도 아침에서 정오로 갈수록 에너지가 넘치다가 오후로 가면서 점점 시들해진다. 달도 새벽으로 갈수록 그 빛을 잃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나는 늘 고정된 사람들의 응원을 받은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배웅과 마중이다. 물론 상대는 그것이 응원인 줄 모르고 한 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가 지쳤을 때, 내가 실수했을 때, 때로는 내가 성공하거나 건재하거나 당당하지 못해도 변함없이 내게 손 흔들어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엄마와 나의 두 아이들이었다. 시쳇말로 신과 어머니 외엔 세상 모두가 내가 잘되면 시기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형제자매간에도 누군가 나보다 잘되면 시기 질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돌아보면 엄마와 별다른 추억이 없다. 엄마의 등에 잇는 손톱만한 점도 내 나이 50이 넘어서야 자세히 봤다. 그래도 엄마는 내게 늘 엄마 자체로 과분하고 아련한 대상이다. [사진 hippopx]

돌아보면 엄마와 별다른 추억이 없다. 엄마의 등에 잇는 손톱만한 점도 내 나이 50이 넘어서야 자세히 봤다. 그래도 엄마는 내게 늘 엄마 자체로 과분하고 아련한 대상이다. [사진 hippopx]

오늘은 나의 엄마와 우리집 남매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다른 집 아이들과 엄마의 관계는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우리 두 남매의 사이는 의리도 강하고 눈물겹다. 나는 유난히 키가 작다. 나의 엄마는 내 키가 작은 것을 당신 탓으로 돌렸다. 한참 잘 먹고 성장해야 할 시기였던 아홉 살부터 사춘기까지 나는 엄마가 없이 살았다. 사춘기 오빠와 조금씩 성장해가던 내가 고아처럼 각자도생했으니 오죽했으랴. 사실 내 인생에서는 엄마의 마중이나 배웅은 없었다. 엄마는 오늘도 막내인 나를 챙기지 못했던 당신의 과거를 후회하셨다. 엄마가 도시로 나가 돈 버느라 나를 못 먹여서 내가 못 큰 거라고 속상해하신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 인생 키로 사는 거 아니에요. 나는 작은 거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눙친다.

시들시들한 남편과 올망졸망 어린 자식 넷을 허리에 매단 엄마는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가장이었다. 엄마의 그 심정을 내가 무엇으로 다 표현할까. 엄마가 막내인 나 하나만 챙기며 살 수 없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런 엄마에게 제발 지난날의 당신을 자책하지 마시라고, 엄마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셨다고 늘 말한다. 그 시절 엄마는 적어도 내게는 영웅이었다. 늘 보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저 멀리서 엄마를 볼 수만 있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골목에 해가 지면, 친구들은 엄마나 할머니가 저녁 먹으라며 데려갔다. 아이들은, 놀란 송사리 떼 흩어지듯 순식간에 각자 집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둠이 깔린 골목에 나 혼자 남겨졌다. 곳곳에서 된장찌개 냄새, 김치찌개 냄새, 고기 굽는 냄새가 어린 나를 몹시 처량하게 했다. 해가 졌지만 누구도 나를 ‘밥 먹으라’며 데리러 와주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 열 살 열한 살. 가끔은 어둠 속에서 집에 갈 생각도 잊고 서 있었다. 친구 집 문밖에 서서 뭔가에 귀를 기울였다. 친구 집에서 마당까지 새 나오는 양은밥상에 밥숟가락 오가는 소리. 엄마나 할머니가 밥 흘리지 말고 먹으라며 두런두런 야단치는 소리.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소리였다. 한 친구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살았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한없이 부러웠다. 나도 엄마는 없어도 좋으니 저런 밥상을 마주해보고 싶었다. 그런 철부지 생각이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새어 나오는 사람 사는 소리를 나는 지금도 구수하고 따뜻한 그때의 아욱국 냄새와 함께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그 집 마당에 서서 된장국 냄새를 오래 맡다가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집에 가면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아 썰렁한 냉골에, 밥도 없었다.

돌아보면 젖 먹던 유아기 외에, 내가 엄마와 살았던 기간은 대략 2년여가 전부다. 그러니 사실 별다른 추억도 없다. 엄마의 손길이 뭔지 기억이 없다. 막내딸인 나는 엄마와 단 한 번도 목욕탕을 가 본 적도 없다. 나는 엄마의 등을 밀어본 적도 없고, 엄마가 내 등을 밀어준 기억도 없다. 내 엄마의 등에 손톱만 한 점이 있다는 것도 사실 내 나이 50이 넘은 뒤에야 자세히 봤다. 그래도 피는 진한 것이라서 엄마는 늘 엄마 자체로 내겐 과분하고 아련하고 슬픈 대상이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엄마의 부재는 지금도 매우 쓸쓸한 그늘로 남아있다. 엄마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결핍이 심해서인지, 나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의 두 아이를 내게서 떨어트려 놓지 않았다. 밥을 굶어도 내 품에서 같이 굶었고, 맛난 것을 먹어도 내 품에 안고 눈을 마주 보며 같이 먹었다. 키 154cm로 작은 나였지만, 두 아이에겐 항상 내가 영웅이었다. 돌아보면 내가 지치고 주저앉고 싶었을 때마다, 나를 영웅으로 보는 두 아이 때문에 강해질 수 있었다. 두 아이가 나를 마중하고 배웅하고 기다려주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 배웅과 마중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아침이면 누군가에게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고, 저녁이 되면 올 때를 기다렸다가 마중해준다는 것. 배웅과 마중은 어찌 보면 인생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부대끼며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아침이면 누군가를 배웅하고, 저녁이면 마중하는 것. 배웅과 마중은 어쩌면 인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진 pxhere]

아침이면 누군가를 배웅하고, 저녁이면 마중하는 것. 배웅과 마중은 어쩌면 인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진 pxhere]

요즘 1인 가구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것은 나이 고하를 막론한 이야기다. 청년도 노인도 대부분 1인 가구다. 아침이면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일터로 나가고, 혼자 집으로 귀가하고, 혼자서 불 꺼진 방에 불을 켠다. 어쩌다 형편이 좀 나은 1인 가구는 반려견이 잘 다녀오라고 꼬리 치며 배웅하거나, 잘 다녀왔느냐고 발바닥을 핥으며 고양이가 마중한다. 그래도 혼자 사는 가구보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의 정신이 훨씬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통계도 있지 않은가. 과거에는 배웅과 마중을 사람과 사람이 나눴다. 그 후 언제부턴가 배웅과 마중을 반려동물들이 절반을 채우고 있다.

오늘의 당신은 당신 혼자 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크든 작든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곁에는 그 누군가가 항상 배웅하고 마중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샘처럼 고여 오늘의 당신이 강처럼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오늘 또 한 번의 배웅과 마중을 한다.

“엄마 다녀올게요.”
“예쁜 딸! 잘 갔다 와. 멋지게 당당하게 홧팅! 아픈 사람 많이 돕고 오너라.”

“다녀왔습니다.”
"오! 우리 딸 왔네. 잘 다녀왔어? 힘든 일은 없었고? 밥 먹어야지? 뭐해줄까?”

오늘도 당신과 내가 건넨 한 마디에서 그 사람의 하루에 등불이 켜지고, 등불이 꺼진다. 이것은 멀리 살아도 할 수 있다. 나와 딸이 나누는 이 배웅과 마중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까?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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