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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깃발 아래' 수천명 대학살 고발한 보스니아 여성 감독

중앙일보

입력

19일 개봉한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를 연출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왼쪽)이 촬영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19일 개봉한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를 연출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왼쪽)이 촬영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이 학살은 1995년에 일어났어요. 유럽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한참 뒤였죠. 그런데 많은 유럽 사람들이 보스니아 학살을 잘 몰라요. 비행기로 고작 한 시간 거리인데도요. 이런 역사를 알려야 했어요.”

보스니아 전쟁 중 세르비아계 군대의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집단학살 사건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19일 개봉)에 새겨낸 야스밀라즈바니치(47) 감독의 말이다. 제목의 ‘쿠오바디스(Quo Vadis)’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뜻의 성경 속 라틴어 구절에서 따왔다. 각본을 겸한 그를 개봉 전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즈바니치 감독 #유럽에 외면당한 95년 보스니아 학살 그려 #지난달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최종 5편 선정 #"UN군 통역관 증언…우익은 지금도 학살 부인"

 'UN의 깃발 아래' 8000명 대학살 참극

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연방 해체 과정 속에 1992년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등지에서 벌어진 민족‧종교로 인한 무장 분쟁이다. 영화는 그 마지막 해인 1995년 세르비아군이 유엔(UN) 안전지대로 선언된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불법 점령하며 시작된다. UN 평화유지군 통역관으로 일하던 주민 아이다(야스나두리치치)가 UN군의 무력함 속에 가족을 구하려 애쓰는 여정이 상영시간 104분간 긴박하게 교차한다. 실제 전쟁 중 유엔군 통역사였던 하산 누하노비치가 2007년 펴낸 책 『유엔의 깃발 아래(Under The UN Flag)』가 토대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지난달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즈바니치 감독은 이 참극이 “보스니아계의 땅과 재산을 노린 세르비아군의 만행”이라 설명했다. 당시 보스니아 전쟁으로 학살당한 스레브레니차 주민은 8000명 이상, 또 1700명이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 20여년이 흘렀지만 아물지 않은 역사다. 어릴 적 보스니아 전쟁을 겪었던 보조출연 배우 두 명은 이 영화에서 세르비아군이 난민으로 가득한 UN 기지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던 중 트라우마로 실신하기도 했다.

역사 인정 않고 전범을 영웅대접하는 그들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1995년 보스니아 사람들이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안전지역인 UN캠프로 피신하며 겪는 참혹한 실화가 토대다. UN군 통역관으로 일하는 주인공 아이다(사진)는 남편과 아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1995년 보스니아 사람들이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안전지역인 UN캠프로 피신하며 겪는 참혹한 실화가 토대다. UN군 통역관으로 일하는 주인공 아이다(사진)는 남편과 아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즈바니치 감독은 “수많은 기록과 증언이 있음에도 국제사회는 세르비아계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권한을 줬다. 보스니아 분할 후 스레브레니차는 세르비아계 통치 지역이 됐다”면서 “그들은 전쟁 범죄자들을 영웅이라 칭하며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진 일을 집단학살로 규정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의 결정을 부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인권침해 세력이 정부에마저 들어가 있어요. 어쩌면 역사적으로 보스니아 학살을 막지 않아서 점점 성장할 수 있게 놔뒀다고 볼 수 있죠. 이 학살은 막을 수도 있었어요. UN이 기지 안에 모든 난민을 수용했거나 세르비아군이 민간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겠죠. 사람들의 선택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UN도 학살 책임져야, 미얀마 사태도 동일선상

영화에서 UN군은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피해 기지로 몰려든 보스니아계 주민 수천 명을 기지가 다 찼다며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세르비아군과 협상을 벌이던 그들은 결국 난민을 세르비아군에 넘겨주고 만다.[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에서 UN군은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피해 기지로 몰려든 보스니아계 주민 수천 명을 기지가 다 찼다며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세르비아군과 협상을 벌이던 그들은 결국 난민을 세르비아군에 넘겨주고 만다.[사진 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에서 그는 UN도 보스니아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 “UN이 스레브레니차를 버린 것은 정치적 결정이었다”면서다. “UN이 여러 나라가 모여 인권을 지키는 아름다운 기관이라 많이 상상하지만, 권력 있는 국가들의 정치 상황, 더러운 거래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는 게 문제죠. UN 담당자들도 보스니아 학살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해요. 현시점의 미얀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즈바니치 감독은 주로 남성의 역사로 기록돼온 보스니아전의 참상을 여성 주인공의 시각에서 꾸준히 그려왔다. 데뷔작 ‘그르바비차’부터다. 이 영화는 아빠가 전사한 전쟁 영웅인 줄 알고 자란 소녀가, 자신이 엄마가 전쟁 중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강간당해 생긴 사생아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겪는 모녀의 극복 과정을 그렸다.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강간 피해 여성을 위한 법적 변화까지 끌어냈다.

전쟁중 강간범죄 그린 데뷔작, 법적 변화 끌어내 

“그때까지 전쟁 중 강간 당한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서 내전 피해자 신분이 없었어요. ‘그르바비차’를 홍보하며 우리는 영화관에서 시민 5만명의 서명을 모았고 보스니아 의회에 가서 3개월 만에 법을 개정했죠. 이제 강간당한 여성들도 내전 피해자 신분이 생겼어요. 그들에겐 큰 의미고 사회적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됐죠.”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데뷔작 '그르바비차'.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비인간적 집단강간 범죄를 모녀의 드라마로 빼어나게 묘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사진 위드시네마]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데뷔작 '그르바비차'.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비인간적 집단강간 범죄를 모녀의 드라마로 빼어나게 묘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사진 위드시네마]

즈바니치 감독은 “많은 사람이 전쟁이란 과거의 고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과거도 있다. 현실의 많은 문제는 타인의 고통을 무시해서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이해에 있어, 이번 영화에 희망을 걸었다. 이 영화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대표작으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에 출품될 수 있었던 것도 그 희망의 근거다.

“영화인협회는 여전히 정치인들로부터 매우 독립적이고 바로 그 협회에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출품작을 선정하고 있죠. 운 좋게도 협회의 모든 영화인이 이 영화를 후보작으로 만장일치 투표했어요. 물론 불만을 가진 우익 인사들도 있었죠. 그들은 집단학살이 현실에서 일어난 적 없다고 주장하니까요. 하지만, 보스니아계뿐 아니라 무수한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지지해줬습니다. 이 영화가 오스카상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을 자랑스러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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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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