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소련, 베를린 봉쇄…미군 수송기 32대 동시 출격 작전

중앙일보

입력 2021.05.22 11:00

공항에 착륙 중인 C-54 수송기를 지켜보는 베를린 시민들. 이는 전시, 평시를 막론하고 역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었다. [사진 wikipedia]

공항에 착륙 중인 C-54 수송기를 지켜보는 베를린 시민들. 이는 전시, 평시를 막론하고 역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이었다. [사진 wikipedia]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 4개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그런 상태에서 냉전이 시작되자 독일은 순식간 동서가 대립하는 최전선으로 바뀌었다.

소련, 서베를린 봉쇄 시도
미국, 수송기 대거 투입
수송기를 포격기로 오인
소련군 격추에 79명 희생

미국은 서독을 서방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1948년 3월 점령지에서 도이칠란트 마르크 화폐의 유통을 승인했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소련은 승전국 위원회에서 탈퇴했고 6월 24일에는 더는 연합군이 서베를린에 주둔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며 압력을 가했다.

전쟁 당시에 베를린을 점령한 것은 소련이니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했다. 또한, 연합국이 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면전, 즉 새로운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전후 복구가 급한 소련이 선택할만한 해법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은 승전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면서 결국 동서독으로 나뉘었다. 수도인 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했으나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동서로 분단됐다. [사진 wikipedia]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은 승전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면서 결국 동서독으로 나뉘었다. 수도인 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했으나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동서로 분단됐다. [사진 wikipedia]

또한 소련은 당시 유일한 핵폭탄 보유국인 미국이 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했다. 따라서 다른 방법으로 서방이 서베를린을 포기하게 하기로 결심했다.

소련은 베를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주장한 그 날 육상 통로를 차단했다. 당시 2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은 서독과 연결된 몇 군데 도로와 철로에서 물자를 공급받던 중이었다.

항공로는 3개만 허용했는데 당시 항공기 수송 능력이 작아서 소련은 굳이 힘들여서 하늘길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련은 얼마 전까지 적이던 패전국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서방이 굳이 전쟁까지 감수하며 대응하지 않을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바로 그날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유럽 주둔 미 공군 사령관인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통일 이전에 서독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3개의 항공로가 있었다. 1948년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했을 때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 [사진 wikipedia]

통일 이전에 서독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3개의 항공로가 있었다. 1948년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했을 때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 [사진 wikipedia]

르메이는 전쟁 당시 유럽에서 B-17 폭격기 부대를 지휘해 독일을 맹타했고 태평양에서는 B-29로 일본 열도를 불바다로 만든 인물이다. 적들이 악마라고 부른 그가 한때 말살 목표였던 적국의 심장에 고립된 패전국 국민을 구원하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르메이는 지금까지 없었던 거대한 공수작전을 구상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 길이 남은 베를린 공수작전(Berlin Airlift)이다.

베를린 봉쇄 3일 만인 6월 27일 대대적인 그러나 인도적인 군사 작전이 실시됐다.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32기의 수송기 편대가 서베를린 상공에 진입하면서 하늘을 찢는 엄청난 소음을 내자 시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빴다.

역사상 최대의 인도적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한 커티스 르메이. 역설적이게도 그는 전시에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wikipedia]

역사상 최대의 인도적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한 커티스 르메이. 역설적이게도 그는 전시에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wikipedia]

베를린 시민은 전쟁 중에 지옥 같았던 폭격을 경험했기에 3년 만에 듣는 대규모 비행대의 소음은 한마디로 공포였다. 그러나 그들이 위기에 빠진 서베를린의 시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불원천리를 날아온 하늘의 천사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포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첫날 보내진 보급품은 고작 80t이었다. 매일 5000t가량의 물자가 필요했기에 소련은 미국의 시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엄청난 지원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의지도 확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송 물량이 늘더니 1949년 4월 16일 부활절에는 무려 1만 2941t의 화물을 공수했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에 대해 교통·통신·무역에 관한 금수를 단행했다. 동유럽은 경제력이 뒤진 지역이고 소련도 아직 도움을 줄 형편이 아니다 보니 고통이 극심했다. 자칫 이들의 이탈까지 우려할 지경이 되자 모스크바의 고민은 커졌다.

결국 소련은 힘겨운 현실을 인정하고 1949년 5월 12일 봉쇄를 풀었다. 그렇게 15개월간 이어진 역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은 막을 내렸다. 이처럼 살얼음판 같던 냉전 시기에 일촉즉발의 위험을 감수하며 실시된 베를린 공수작전은 암울했던 냉전 시기의 횃불이었다.

하지만 작전 동안 소련군의 요격 등으로 79명의 귀중한 인명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들의 용기와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쾌거였다.

남도현 군사칼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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