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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윤 공소장 공개죄' 만들겠다는 박범계 장관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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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20일 오전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내 법무부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20일 오전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내 법무부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공소장(公訴狀) 공개에 대해 '죄'를 물어 처벌하겠다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노력이 점입가경이다. 박 장관은 수원지검 형사3부가 이 지검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 기소한 다음 날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여러 언론이 이 지검장 공소장 범죄사실을 입수해 보도한 직후부터 이를 '불법 유출' 프레임으로 규정했다. 공교롭게도 이규원 검사 수사 무마에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도 관여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두고서다. (중앙일보 5월 13일 '[단독]이성윤 공소장엔…조국 "이규원 유학 가니 수사 말라"' 참고)

키워드: 공소장(公訴狀)과 공판(公判)

당사자 송달 전?…피고인 이성윤도 자기 공소장 볼 수 있었다 

박 장관은 보도 당일 한 언론과 통화에서 "심각한 사안"이라더니 이튿날인 14일 "공소장 범죄사실 전체가 당사자 측에 송달도 되기 전에 그대로 불법 유출됐다"며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17일엔 기자들이 "기소 후 공소장 공개는 불법으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고 묻자 "피고인은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있고 개인정보·수사기밀 보호같은 법익이 침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19일엔 언론과 야당의 '내로남불' 비판에 "마지막 선을 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며 엄포를 놨다.

그래도 '공소장 공개 처벌 조항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법무부는 20일 "국가공무원법상 비밀 엄수의 의무, 성실 의무, 품위 유지의 의무 등 위반을 적용할 수 있다"고 국가공무원법을 꺼냈다.

그러더니 또 하루 만에 박 장관은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을 관리하는 법이 있고 그런 형사사법 정보를 누설·유출하는 경우에는 처벌 조항도 있다"며 ‘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형전법)’이란 생소한 법률을 찾아냈다. 압수수색영장 청구 등 수사기밀을 피의자에게 유출할 때 썼던 형사사법정보유출 조항을 공소장에 적용하는 최초의 시도를 하겠다는 뜻이다.

박 장관은 당사자 송달을 문제 삼지만 이성윤 지검장은 KICS 등재 즉시 공소장을 직접 보거나 휘하 검사들로부터 보고받을 수 있었다.

'비공개' 이어 처벌?…대한민국 법전엔 '공소장 공개죄' 없다

문재인 정부 법무부 장관들은 앞서 최순실 국정농단,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삼성,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사법농단 사건에선 공소장 공개는 지지하거나 적어도 침묵하더니 문재인 정부의 권력 수사부터 건건이 '피의사실공표'를 문제 삼고 '공소장 비공개'란 새 원칙을 창조해냈다.

박 장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개인정보보호법과 공무상 비밀누설, 국가공무원법에 이어 형전법을 뒤져가며 아예 '공소장 공개죄'를 만들어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형법을 포함한 대한민국 법전 어디에도 공소장 공개를 '죄(罪)'라고 규정한 조항은 없다. 형법 126조 피의사실공표죄는 범죄수사 직무담당자가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12월 9일부터 공소제기 전) 공표한 때에 처벌할 수 있다. 127조 공무상 비밀누설죄는 '법령에 의한 직무상 비밀'을 누설한 때 처벌한다. 공소제기를 전제로 하는 공소장은 비밀이 아니다.

또 우리 헌법은 범죄와 형벌을 법률로 정할 것을 요구하며 그 형벌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을 죄형법정주의라고 한다.

공소장·형사재판 공개 왜?…국가형벌권, 국민이 감시해야 한다

더욱이 국가가 죄를 지었다고 의심하는 국민을 처벌해달라고 법원에 형사소추(기소)하는 문서를 공소장(公訴狀)이라고 하고, 국가와 형사피고인이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을 공판(公判)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형벌권 행사로 인해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막기 위해 공소사실을 포함한 재판을 공개해 국민 감시 아래 둬야 한다는 뜻이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공개 재판을 국민의 권리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국가 권력에 '밀실 수사' '비밀 기소' '밀실 재판'을 허용할 경우 권력자와 고위 공직자의 죄를 숨기거나 봐주고, 무고한 국민은 없는 죄를 만들어 처벌하는 일이 횡행할 때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역사에 이런 일들이 실제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1974년 5월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다.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은 영장 없이 체포·구속된 뒤 변호인은 물론 가족 접견도 거부된 채 밀실 수사를 통해 비상군법회의에 기소됐다. 1·2심은 비공개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고 이듬해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3명 대법관 중 이일규 대법관 단 한 명의 반대로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18시간 만에 8명 전원에 사형을 집행했다.

입법·사법·행정 권력이 총체적으로 가담한 살인이었다. 국민의 감시와 통제가 사라질 때 이런 권력에 의한 살인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박 장관은 "법무부 장관이기 이전에 여당 국회의원"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우리 민주공화국과 법치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식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정효식 사회1팀장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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