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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떠나 포도농사 로망 이뤄, 와인은 새 인생 촉매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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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호 24면

[와글와글] 피터 메일 『나의 프로방스』

나의 프로방스

나의 프로방스

10년 전쯤 나는 파리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해마다 봄에 칸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콘텐트 마켓 mip-tv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책을 읽다가 무료함을 달랠 겸 승무원에게 와인을 주문해 마시려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재미있는 책인가 봅니다. 열심히 읽으시는 것을 보니?” 저명한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둥근 안경을 쓴 중년의 한국 남자였다.

빡빡한 뉴욕·런던서 살아온 영국인 #남프랑스 시골서 재출발 스토리 #“향 깊은 거만한 어깨 가진 포도주” #샤토뇌프뒤파프 등 와인 얘기 가득

“뉴욕과 런던에서 경쟁과 성과 위주의 삶을 살던 영국인이 훌훌 털고, 프로방스의 시골 마을에서 재출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네요. 올해 제 나이가 환갑이거든요. 인생의 전환점이 간절합니다. 일단 프랑스 남쪽으로 가서 피레네산맥 넘어 산티아고까지 5주간 홀로 걷기에 도전해 보려 합니다. 한편으로는 기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되는군요.”

어느 중소기업의 창업자라던 그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전하게 완주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안경 너머의 묘한 표정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가 읽던 책은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 며칠 전 보라색 라벤더꽃이 가득한 프로방스의 봄 사진을 발견하고 이 책을 다시 손에 집어 들었다. 처음 번역됐던 2004년에 처음 읽고, 칸 출장길에 두 번째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읽는 셈이다. 광고인으로서는 성공했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실패했던 저자가 남프랑스의 200년 된 허름한 집을 사서 고치며 겪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다. 카피라이터 출신답게 첫 문장부터 유혹한다.

“새해는 점심으로 시작되었다.”

나의 프로방스

나의 프로방스

프로방스의 라코스트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 주인이 단골손님들을 초대해 내놓은 핑크빛 샴페인과 여섯 코스의 식사 이야기부터 들려줌으로써 독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 새해라는 산뜻한 단어와 점심이라는 따뜻한 단어의 유쾌한 결합이다. 이 책에는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넘치고 또 넘친다. 남프랑스의 생선 매운탕이라 할 수 있는 부야베스, 올리브 샐러드, 신선한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송로 버섯으로 만든 요리, 이처럼 먹고 마시는 얘기가 많은 만큼 그는 글도 맛있게 쓴다. 당연히 프랑스 빵 이야기가 빠질 리 없다. 양파빵, 마늘빵, 올리브빵, 양젖치즈빵, 백리향빵, 후추빵, 견과를 넣은 빵에서 밀기울을 섞은 빵까지, 헤아린 빵의 종류만도 열여덟 가지나 되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빵집 여주인에게 도움을 청한 에피소드도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포도농사 이야기, 그 1년이 곧 인생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를 수확하며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 속에 포도주를 의미하는 뱅(vin), 포도수확기를 뜻하는 방당주(vendange) 같은 프랑스어도 자연스레 등장한다.

“일꾼들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에 실린 한 장면처럼 포도밭 위의 둑에 둘러앉아 광주리에 담긴 것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4L의 포도주 말고도, 얇게 썬 빵을 튀겨 설탕을 뿌린 트랑쉬 도레가 가득 쌓여 있었다. (중략) 앙드레 할아버지는 포도주 한잔 들고 늙은 도마뱀처럼 양지바른 곳을 찾아가 앉았다.”

프로방스를 상징하는 로제 와인을 비롯해 많은 와인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신경영 선언 20주년 기념 만찬에 나와 화제가 되었던 와인도 등장한다. ‘샤토뇌프뒤파프’, 프랑스어로 ‘교황의 새로운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비뇽에 교황이 있던 시절 유래된 고급 와인이다. 저자 메일은 샤토뇌프뒤파프 와인이 ‘색이 짙고 향이 깊다’는 말과 함께 “거만한 어깨를 가진 포도주”라는 재미있는 평도 소개한다.

얼핏 먹고 마시는 식도락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과 다른 가치관을 비교하고 있다. 저자의 모국 영국인들이 자동차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먹을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표현이 바로 그런 경우다. 시골에서 사는 동안 도시의 삶에서 느끼지 못했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웃의 새로운 발견이다. 메일은 농촌에서 이웃은 삶의 일부이며 자기 자신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습과 문화의 상이함과 모국 사람들의 염치없는 행동들을 정색하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살짝 꼬집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메일은 원래 프로방스에서 소설을 쓰려고 했으나 글이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그의 에이전트에게 낯선 이국의 땅에서 겪는 일상의 해프닝을 털어놓았는데, 그 얘기를 들은 에이전트가 소설은 나중에 쓰고 우선 지금까지 겪은 것들을 엮어 보라고 권유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처음 영국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는 고작 3000부만 인쇄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폭풍적인 인기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이내 40개 언어로 번역됐다. 이후 9권의 소설을 포함해 총 15권의 책을 펴냈으며, 『어느 멋진 순간』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러셀 크로와 마리옹 코티야르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플랜 A보다 플랜 B가 더 효과적이었다. 와인은 그의 새로운 인생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만약 60이 된다면 어떤 계획이 있어요?”

10년 전 옆자리에 앉았던 분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 책의 원제목 ‘a Year in Provence’(프로방스에서의 1년)처럼 나도 전혀 낯선 곳에서 1년 정도 살아 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 꿈은 그러나 생활의 무게 때문에 아직 성취되지 않은 로망으로 남아 있다. 나이 들어 로망을 잘못 추구하면 자칫 노망이 될 수도 있다지만 로망은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한다. 젊음은 떠났어도 열정은 우리 곁에 아직 남아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저마다의 프로방스를 품고 있을 테니까.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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