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화치귀신은 예절 바르고 겸손, 불미스런 일 안 일으켜”

중앙선데이

입력 2021.05.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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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7〉

신생국 미국은 노동력이 부족했다. 철도 부설에 투입할 중국 노동자들의 이민을 묵인했다. [사진 김명호]

신생국 미국은 노동력이 부족했다. 철도 부설에 투입할 중국 노동자들의 이민을 묵인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은 이웃 나라와 교류만 있었지 외교는 없었다. 영국의 함포에 놀라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조약에 서명하면서 현대적 의미의 외교가 시작됐다. 중국은 항상 열세였다. 100년간 열강들에게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국력의 차이가 크다 보니 완전 평등은 불가능했지만, 열강 중 비교적 손해를 적게 입힌 나라가 미국이었다. 첫 단추가 나쁘지 않았다.

1784년 8월 미 상선 첫 중국 입항
중 상인들 낯선 선원·물품에 호감
반세기 넘는 미국인 우대 시발점

당대 중 지식인들 미 사정에 깜깜
“미국 4년에 한 번씩 큰 두목 선출”

‘중국황후호’ 6개월 항해 후 광저우에  

18세기 말, 미국 상인들이 광저우에 건립한 상단(商團)건물. [사진 김명호]

18세기 말, 미국 상인들이 광저우에 건립한 상단(商團)건물. [사진 김명호]

1754년 2월 필라델피아, 7년 전 리버풀에서 부모 따라 이민 온 20세 청년 로버트 모리스가 회사를 차렸다. 해운업으로 수입이 쏠쏠했다. 39세 때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조지 워싱턴 부대의 군수물자 조달을 전담했다. 대륙회의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북미 최초의 사설은행도 설립했다. 모리스는 중국과 직접 상거래를 하고 싶었다. 뉴욕 재계의 거두 파커와 죽이 맞았다. 12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공동명의로 영국에서 엠프리스 차이나, ‘중국황후호(中國皇后號)’를 매입했다. 파커가 화물관리인으로 새뮤얼 쇼라는 29세의 청년을 추천했다. 훗날 산마오샤오(山茂召·산무소)라는 중국이름으로 중·미관계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새뮤얼 쇼는 독립전쟁 기간 워싱턴이 “총명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용감한 장교”라고 치하한 포병 출신이었다.

모리스는 출항을 언제 할지 고심했다. 선장이 짜증을 냈다. “고민할 필요 없다. 미합중국에서 최고의 길일은 조지 워싱턴의 생일이다.”

1784년 2월 22일, 뉴욕항에서 요란한 출항식이 벌어졌다. 미국 인삼, 모피, 후추, 면화, 납, 계수나무 껍질 등을 만재한 ‘중국황후호’가 중국을 향했다. 대서양과 희망봉, 인도양을 거쳐 8월 28일, 6개월 만에 광저우(廣州)의 황푸(黃埔)항에 도달했다.

새뮤얼 쇼는 단순한 화물관리인이 아니었다. 광저우까지 오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항해일기를 남겼다. 광저우에 도착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상인들과 교역을 진행하며 민속과 풍정을 이해하려 애썼다. 일기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처음 보는 미국 상선을 보고도 중국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우리를 관대하게 대했다. 영국인과 구별하기 힘들다며 웃기까지 했다. 미국 지도를 보여주자 인구와 영토 확장 계획을 상세히 물었다. 성실히 대답하자 상인들은 중국에 필요한 물건이 많겠다며 좋아했다. 문화를 이해하고 예의를 갖춰 존중하면 미국이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교역국이다.”

미국에서 출간한 중국 일기에 실린 새뮤얼 쇼의 유일한 모습. [사진 김명호]

미국에서 출간한 중국 일기에 실린 새뮤얼 쇼의 유일한 모습. [사진 김명호]

‘중국황후호’는 이듬해 5월 중순 광저우를 떠났다. 홍차, 녹차, 도자기, 상아부채, 비단, 수공예품을 가득 싣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뉴욕에 도착하자 신문에 중국상품 판매 광고를 냈다.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순식간에 동났다. 조지 워싱턴도 사람을 파견했다. 도자기 320점과 찻주전자, 상아로 만든 부채 등을 구입했다.

조지 워싱턴은 중국과 직접 교역을 기획한 모리스를 초대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선장도 몸값이 치솟았다. 7개 무역회사가 중국무역 고문으로 영입했다. 새뮤얼 쇼는 귀국 직후 국무장관에게 상세한 보고서와 광저우 관리들이 준 비단 두 필을 보냈다. 국무장관은 쇼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 정부는 쇼를 광저우 주재 영사에 임명했다. 당시 영사는 명예직이었다. 월급도 없고 임명장도 없었다. 쇼는 5년간 영사직을 수행하며 네 번 광저우 땅을 밟았다. 중국인들은 조지 워싱턴은 몰라도 새뮤얼 쇼는 알았다. 1793년 네 번째 방문을 마치고 오는 도중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중국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국무역으로 거부를 축적한 백만장자들이 속출했다. 1795년, 미국인이 광저우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년이 흘렀다. 외교관계가 없어도 미국 상인들은 광저우 출입이 자유로웠다. 광저우에 미국인들이 들끓었다. 중국인들은 미국인 거처에 나부끼는 성조기를 화치(花旗)라고 불렀다. 관리들은 미국을 접할 기회도 없었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영국과 차별은 확실히 했다. 사고 친 영국인 질책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다. “화치귀신은 우리말을 할 줄 알고, 우리 복장도 착용한다. 자기들 할 일만 하고, 중국인들과 작당해 불미스런 일 일으킨 적이 거의 없다. 겸손하고 예절도 바르다.”

미·중 교역 기획 모리스, 재무장관 임명

중국 화가가 상아부채에 남긴 ‘중국황후호’ 의 광저우 입항 장면. [사진 김명호]

중국 화가가 상아부채에 남긴 ‘중국황후호’ 의 광저우 입항 장면. [사진 김명호]

중국의 지식인들도 미국 역사나 지리적 위치, 정치제도에 백지 수준이었다. 당대의 석학 완위안(阮元·완원)조차 미국이 아프리카 경내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총독의 상주문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미국 오랑캐들은 나라에 주인이 없다. 두목들이 4년에 한 번씩 큰 두목을 선출한다. 미국은 개화가 덜 된 원시부락 수준이다.” 대통령에 대한 호칭도 ‘미국황제’ ‘미국민주’ 등 갖가지였다. 1837년 중국을 방문한 프러시아 선교사가 중국식으로 조지 워싱턴을 소개했다. “성군(聖君)이다. 미국인들에겐 중국의 요순(堯舜)이나 다름없다. 경륜이 한 시대를 덮고도 남을 인재였다. 관대하고, 인자하고, 청렴하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도덕군자였다.” 중국의 미국인 우대는 반세기 이상 계속됐다. 흠차대신 린쩌쉬(林則徐·임칙서)가 영국의 아편을 소각할 때도 미국인 2명의 입회를 허락했다. 아편전쟁에서 철저히 패한 중국은 난징(南京)에서 영국이 요구하는 가혹한 통상조건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난징조약은 중국이 서구열강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소식을 들은 미국 의회가 술렁거렸다. 중국과 새로운 경제무역 관계 확립이 필요하다며 대통령 존 타일러를 압박했다. 존 타일러도 미국인이었다. 의회의 주장에 공감했다. 청 제국의 수도 베이징에 상주하며 영국과 동등한 통상조건을 쟁취할 정식 외교관을 물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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