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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국가가 할 일, 기업이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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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전(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 참석차 미국 워싱턴 앤드류스 합동공군기지에 도착, 전용기에서 내린 후 마중 나온 미국측 인사와 주먹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전(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 참석차 미국 워싱턴 앤드류스 합동공군기지에 도착, 전용기에서 내린 후 마중 나온 미국측 인사와 주먹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말은 멋있는데, 어쩐지 짠하다. 한·미 정상회담의 의제 중 하나인 '백신 협력' 이야기다. 미국에 백신 생산 허브 구축, 백신 스와프 방안을 제안하겠다고 한다. 솔직해지자. 고난이 백신 개발 경험도 없는 한국이 미국과 협력 운운하는 것은 정신 승리에 가깝다. 물론 한국의 의약품 위탁생산(CMO) 능력은 우수하다. 반도체처럼 생산 능력 자체가 경쟁력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백신 후진국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파트너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어쩌다 백신 지체국이 된 한국이 미국에 손을 벌리는 것이 이번 회담의 본질이다.

국가 무책임이 불러온 백신 가뭄 #기업들 앞세워 해결하려는 정부 #반도체·배터리 없었으면 어쩔 뻔

그나마 반도체와 배터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바이든과 마주 앉는 문재인 대통령은 굶는 식구를 위해 형님한테 쌀 빌리러 가는 흥부처럼 자존심을 구겼을 것이다. '반도체를 주고 백신을 받자'는 교환의 모양새라도 갖출 수 있으니 조금은 체면이 살았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제 전략 중점이 인도·태평양으로 옮겨가면서 미국이 생각하는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달라졌다. 한국의 몸값을 올려주는 것은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코어 테크'다. 삼성이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 초청받지 못하고, LG와 SK의 배터리 싸움을 미국이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은 우리에겐 악몽이다.

임기 내내 반기업 정책 기조를 펼쳤던 문재인 정부에서 기업이 정부의 체면을 살려 주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마다 기업인들이 동행했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인 국가적 '딜'을 위해 기업을 앞세운 경우는 없었다. 정부로서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릴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반도체-백신 교환 프레임은 문제가 있다. 반도체가 21세기 석유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전략 물자가 됐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기업의 영역이다. 반도체 투자는 기업으로선 사활이 걸린 문제다. 국가의 지원이 반도체 산업에서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수십조원이 드는 투자를 국가가 강요할 수는 없다. 반면 백신은 국가의 책임이다. 국민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지만 '초고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백신 개발 프로젝트는 인정해줘야 한다. 미 정부가 민간 제약사에 백신 개발 및 선구매 명목으로 14조원이 넘는 돈을 지원한 것은 팬데믹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보여준 결단이었다.

우리는 어땠나. 국민 고통에 의존한 K방역을 믿고 '백신이 급하지 않다'고 큰소리를 쳤다. 헛돈 쓸까 봐 백신 선구매에 미적거렸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정부 흠집 잡기로 매도했다. 그 결과 K방역의 자존심은 백신 지체국이라는 오명으로 구겨져 버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눈·귀 밝은 나라들이 휩쓸고 간 백신 확보 전쟁터에 뒤늦게 뛰어들며 기업을 앞세우고 있다. 관료주의와 진영논리에 묻혀 길 잃은 국가 책임을 민간에 떠넘긴 꼴이다.

문 대통령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모더나와 위탁 생산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도 미국으로 갔다. 대통령이 말한 '백신 생산 허브' 구축의 첫걸음 격이다. 그 다음 날 이 회사의 전 대표는 삼성물산 합병 재판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법정에 출두했다. 엇갈리는 두 장면에서 한국 기업들이 처한 이율배반의 현실을 읽었다면 지나친 감수성인가.

실세라는 한 초선 여당 의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론과 관련해 "이 부회장이 백신에 있어 요술 방망이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돈 많은 사람들은 죗값을 덜 받는다는 인식을 깨보는 것이 삼성과 대한민국 전체를 봐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재용 사면이 사법 잣대의 공평성을 허물 것이라는 목소리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기업을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을 볼모로 잡고 '공정'과 '실리' 중 어느 것이 정치에 유리할지를 재고 있다면 그건 위선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