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여친 생기면서 아빠와 평화 모드로 바뀐 아들

중앙일보

입력 2021.05.20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84)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을 때 책 모서리를 살짝 접어둔다. 다시 만나자는 책과의 약속이다. 어느 시점에 떠오르는 첫사랑처럼 책 모퉁이를 접는 것은 설렘이다. [사진 pixabay]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을 때 책 모서리를 살짝 접어둔다. 다시 만나자는 책과의 약속이다. 어느 시점에 떠오르는 첫사랑처럼 책 모퉁이를 접는 것은 설렘이다. [사진 pixabay]

말(言)의 귀를 접듯 날아온 선물

마냥 어리고 응석받이였던 아들을
딸의 눈으로 바라보고 읽은 뒤
시집 모서리, 말(言)의 귀를 접듯
매듭 엮어 날아온 나비 리본

들판 저쪽으로만 내달리려는
조랑말 같은 피붙이에게
날아보지 못한 아비의 종이비행기
홀쳐맨 날갯짓을 가르쳐보았지

종이비행기는 한 번도 겨냥했던 곳에
도달하지 못했지 아마
하지만 미끈한 활강은
겅중겅중 손뼉 치며 쫓을 만했어

몸 가벼운 꽃잎은 흔들바람도 잘 탄다던데
무엇이든 접을 수 있는 색종이같이
말의 귀를 삼아 날아온 네가
종이비행기에 태울 수 없는 뜻밖의 선물이었네

해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만나면 책의 모서리를 살짝 접어둔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감동의 표시다. 책에 아무리 밑줄을 많이 그었어도 페이지 귀를 접어두는 의미는 다르다. 다시 만나자는 책과 나와의 약속이며, 손가락 걸어 맹세하는 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어느 때 어느 시점에서는 추억이 떠오르고야 마는 첫사랑처럼, 책 모퉁이의 귀를 접는 동작은 설렘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을 때, 시집에는 접힌 귀가 많아진다. 시집에는 밑줄을 치기보다 귀를 접는 행위가 더 경건하다. 한 문장의 짜릿함보다 가슴 저미는 한 편의 우리함이 시의 참맛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을 느낄 때 말의 귀를 접어 둔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말과 글의 귀를 접어둔다. 홍수처럼 떠내려가는 언어를 낚시질해 잡아두고 싶은 심정을 귀를 접는다고 표현하고 싶다. 접혀진 귀는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의미의 모음집이 된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이 아는 책꽂이에 귀를 접어둔 의미의 사전이 있다.

잘 된 시 한 편은 우리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시가 우리를 읽어낸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갈 건지 가리키는 애틋함과 토닥임을 준다. 바닷가에서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걸으며 첨벙이다가 확 몰아치는 파도에 놀라 뒷걸음치며 가슴을 쓸어안는 것처럼 시에는 의외성과 놀람이 있다. 파도를 향해 바닷물과 모래밭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게 만드는 유희와 천진함을 준다.

아들이 사귀는 여자친구에게서 시집과 카드 선물을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닌 진심을 담은 표현.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담기는 법이다. [사진 pixabay]

아들이 사귀는 여자친구에게서 시집과 카드 선물을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닌 진심을 담은 표현.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담기는 법이다. [사진 pixabay]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키울 때 많은 것을 기대하고 꾀했으나 언제나 목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부모와 전혀 다른 캐릭터이고 독립된 인격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사춘기 무렵부터 사사건건 부모가 이끄는 길과 다른 쪽으로 가려고 부딪친다. 냉전 기류가 흐르다 못해 아버지의 말발이 서지 않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묘하게 갈등만 일으키던 아들이 이성친구와 사귀게 되면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엇인가 깨달은 듯 평화의 모드로 전환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아이를 바로잡는다는 핑계로 아이 행동을 제한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한다. 스스로 삶의 과정을 배우며 즐길 수 있도록 지켜보는 편이 낫다. 이성친구로부터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애틋한 심정과 기쁨도 배우고, 서로 의견이 달라 헤어지는 아픔도 겪어야 한다. 그래야 성숙한다.

자식이 자라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공중에 날려보면 의도한 데로 도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온힘을 들여 날리면 가끔씩 멋진 활강으로 기쁘게 한다. 종이비행기는 원래 목표지점에 보내려고 날리는 게 아니다. 제멋대로 날다가 땅에 안착하는 모습을 즐기려 날린다. 활강하는 비행기 뒤를 따라 까르르 웃으며 뒤쫓는 아이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게 목적이다. 작은 손으로 어설프게 접은 종이비행기를 직접 날리며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게 전부이다.

오래 멀리 날리려면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날리면 된다. 날려 보내는 힘보다 자기 위치가 중요한 거다. 높은 곳에 올라가 공중에 던지고 나머지는 그냥 땅의 중력에 맡기면 알아서 멋지게 활강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차원만 높이고 날아가는 모습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모든 걸 다 하려는 게 아니라 반만 하는 게 종이비행기를 잘 날리는 요령이다. 어느 조건까지는 맞춰주고 나머지는 흐름에 맡겨두는 일, 즉 수동적으로 주의 집중하는 게 다 같이 사는 길이다.

종이비행기를 공중에 날리면 의도한 데로 도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래 멀리 날리려면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날리면 된다. 날리는 힘보다 자기 위치가 중요하다. [사진 pixabay]

종이비행기를 공중에 날리면 의도한 데로 도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래 멀리 날리려면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날리면 된다. 날리는 힘보다 자기 위치가 중요하다. [사진 pixabay]

부모는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보모와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사춘기 전까지는 교사 노릇을 해야 한다. 고등학교와 대학생일 때는 아이들이 스스로 다가와 질문을 할 수 있는 멘토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와 멘토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학생들이 나타나는 법이다. 특히 멘토는 공감을 잘 하며 비밀을 지키는 열린 귀와 접힌 귀 두 개를 지녀야 한다.

어느 날 아들이 사귀는 여자친구에게서 시집 선물을 받았다. 내가 시를 좋아한다고 아들을 통해 들었는지 시모음집 두 권을 예쁘게 포장해 나비 리본에 묶어 전해왔다. 카드에는 제법 긴 글이 적혀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나름의 진심을 담은 표현이다. 느낌과 울림이 있었다.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담기는 법이다.

아들의 여자친구에게서 받은 시집 선물과 간략한 내용의 사연을 읽으니 부모의 도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 시점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덧 부모가 해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천 번을 접어야 했던 종이학을 날려 보내야 할 때가 도래했음에 감사하였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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