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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정부 수립 이래 달라진 게 없는 한국 정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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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작동하지 않는 대의정치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의민주주의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온 나라가 촛불에 파묻혔던 2008년 6월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정상이 아니었다. 악의적 유언비어에 국민이 공포에 떨었다. 신뢰 잃은 여당은 속수무책이었고, 신난 야당은 국민 분노를 부추겼다.

국회의원이 국민 대표하지 않아 #기댈 데 없는 국민의 촛불시위 #두 차례 겪고도 달라지지 않아 #정치-국민 잇는 새 패러다임 필요

정치는 없었다. 선량들은 국민을 대표하지 않았고, 국민도 선량들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때 이렇게 썼었다.

“대표들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 때부터 거듭된 경고음에 대통령은 귀를 막았다. 집권당은 그런 대통령의 눈치만 살폈고 청와대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야당은 아예 거리로 나섰다. 국민의 분노를 실지(失地) 회복의 기회로만 여겼다. 슬그머니 촛불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따가운 눈총 말고 다른 건 얻지 못했다.”

기댈 데 없는 국민은 직접 거리에 나섰다. 사실 촛불을 가장 먼저 든 건 선거권 없는 고교생들이었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는 급격한 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초중고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등을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고교생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모인 게 시작이었다. 이후 서울 청계천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 주말마다 다양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참으로 시작은 평화로왔으나 끝은 파괴적이었다.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기름을 부은 건 MBC PD수첩의 보도였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위험을 과장한 명백한 오보였다. 과장된 만큼 국민의 공포를 키웠다. 그해 5월 2일 한 인터넷 카페가 주최한 ‘제1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1만명이 모였다. (주최 측의 참여 예상 인원은 300명이었다.)

이후 거리행진으로 규모가 커진 촛불시위는 현충일 연휴와 6월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절정으로 타올랐다. 자유발언, 즉석토론, 문화행사 등의 비폭력 시위에 10~50대의 다양한 연령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부 시민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폭력적으로 변질됐다. 당연히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줄었고 촛불은 서서히 꺼졌다. 5월 2일~8월 15일 사이 전국적으로 2398회의 촛불집회가 열렸다. 참여인원은 경찰 추산 93만2680명, 주최 측 주장 300만명이었다.

100일 이상 국가가 마비되는 상황에서도 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촛불시위가 미국산 쇠고기 때문만이 아니라, ‘고소영’ ‘강부자’로 대변되는 인사 참사, ‘한반도 대운하’ 같은 일방통행에서 비롯된 국민 분노의 산물이었음에도 여당의 견제와 제동은 없었다. 오직 ‘친이’와 ‘친박’의 권력 다툼뿐이었다.

정부 일방통행, 여당은 하수인 전락

정치의 부재에는 정치권에 대한 대통령의 부정적 시각도 한몫했다. 이미 서울시장까지 거친 정치인이 됐는데도 이명박은 여전히 기업인에 머물렀다.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통하던 건설사 사장처럼 국가를 경영했고, 민주주의란 개념은 처음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기관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기관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그것을 일깨워줬어야 할 여당 의원들조차 기업 임원이나 간부처럼 굴었다. 대통령이 귀를 막고 정당이 역할을 못 하니 국민이 정부와 직접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의민주주의가 사망선고를 받은 게 2008년 촛불시위였다. 자기가 뽑은 선량에게 기대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인터넷에 올리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며 의기투합해 밖으로 나온 게 촛불시위대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2016~2017년의 촛불 시위는 기획된 성격이 좀 더 짙었다. 2016년 10월 29일의 첫 촛불집회를 주최한 건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였다. 집회의 명칭도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 박근혜 시민촛불’이었다. 8년 전 촛불시위에도 불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일부 시민단체들이 총궐기하는 양상이었다. 사실 그들은 정권 초기인 2013년부터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대선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을 통한 부정선거”라는 주장이었다. 이듬해 세월호 침몰 때도 책임을 정권 탓으로 돌리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입수해 보도한 JTBC 보도가 기름을 부었다. 국정 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경찰 추산 1만2000명, 주최 측 주장 3만명이 광화문에 모였다.

이 촛불시위는 “모이자! 광화문으로! 밝히자! 전국에서!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 “박근혜 즉각 퇴진 범국민행동”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등의 명칭으로 바뀌며 23차 집회까지 이어졌다. 주최 측의 목표는 퇴진만이 아니라 ‘박근혜 구속 수감’이었다. 20차 집회 하루 전인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이 내려져 시민들이 외치던 퇴진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집회가 23회까지 계속된 이유다. 특히 그해 2월 25일 열린 17차 집회의 명칭은 ‘박근혜 4년, 너희들의 세상은 끝났다’로서, 집회 주최 측이 정치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때도 대의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여당 의원들의 관심은 지금까지 떠받들던 대통령의 절망적인 운명도, 혹한 속에서도 촛불을 꺼뜨리지 않던 국민의 절절한 바람도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자신들의 정치생명 연장 생각만 있었다. 어떻게든 폐족이나 면해 책임 없는 야당으로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여러모로 난관과 장애가 가득할 게 분명한 다음 정권을 흔들어대다 보면 재기할 기회가 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온 나라가 촛불에 타들어 갈 때 정치 대신 길에서 상황을 즐겼던 현 정권은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독배를 마셨다. 길에서 지갑 줍듯 굴러들어온 정권인데도 마치 자신들을 위해 촛불이 켜진 줄 착각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야당은 지지 착각 속 거리 정치

사실 이명박의 정치 외면은 그 특유의 실용주의 결과물이었다. 정치는 안 해도 잘 먹고 잘살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청와대 뒷산에 올라 떨면서 바라본 촛불 시위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시위의 배후에 친노세력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자, 약속을 저버리고 정치 보복에 들어갔다.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측근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와 함께 뇌물과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누구나 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권을 주운 현 정부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한풀이’가 검찰 개혁에 집중된 이유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무리와 억지가 따랐다. 촛불시위를 자기들이 이룩한 혁명으로 명명한 이들은 혁명세력처럼 굴었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파괴에 거리낌이 없었다.

최장집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촛불시위부터 시작됐다”고 단언하는 이유다. “촛불시위로 인한 대통령 탄핵 이후 민주당 정부는 역사 청산, 적폐 청산 등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촛불시위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전 사회의 성과와 보수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최 교수의 진단이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대의정치는 부재했다. 처음부터 대의(代議)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 관철하려고 노력했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폐로 몰아붙였다. 송호근 교수는 이를 두고 “이번 정권이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편협한 정책관을 강행했다”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사회 민주화의 목표인) 격차와 차별 해소가 아니라 경쟁 상대인 정치세력을 내치는 레토릭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현 정권의 이런 생각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2015년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준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치했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지금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반대했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이 다수당이어서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주장을 야당의 정치공세로 여긴다면 중립적이고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에 여야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의뢰하기를 청와대와 여당에 제안한다.”

한마디로 의회민주주의의 부정이자 대의정치의 포기였다. 적어도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른 명이 넘는 장관급 임명을 강행한 정부의 수반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 땅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도 마찬가지다. 최 교수는 “대통령이 책임성의 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당인데, 정당이 늘 대통령의 하위도구,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이승만 정부부터 현재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대의민주주의 작동한 적 있었나

그러다 보니 대의정치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턱없이 부정적이다. 대의제 기관인 정치인과 정당은 대표성 평가에서 각각 10점 만점에 2.95점, 3.89점에 불과했다.(그래픽 참조) 신뢰도 역시 대의제 기관이 다른 기관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국회의원과 정당의 신뢰도는 각각 2.49와 2.9로 판사(3.5)와 검사(3.32)보다 낮았다. 누가 누굴 개혁한다는 건지 실소가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존 나이스비트 같은 미래학자가 “미래에 정치인이란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이유다.

현 정부 같으면 더욱 그렇다. 정부가 국민(사실은 지지자)과 직접 소통하니 대표가 필요 없다. 하지만 후유증이 크다. 편협한 세계관에 따른 일방통행식 정책 강행, 다른 의견은 덮어버리는 마녀재판, 현실무시 대안부재의 포퓰리즘을 우리가 이미 체험하고 있듯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나 느낀다. 대의정치는 더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제가 아니다. 그것이 부족함을 드러낼 때마다 촛불에 기댈 수도 없다. 그 비용을 떠안는 건 결국 국민이다. 대안이 없다는 체념은 도움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정치와 국민을 잇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계속〉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