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성관계 영상 "지웠다"더니 백업…前남친 배상 첫 인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진 연합뉴스TV]

[사진 연합뉴스TV]

‘OO녀’.
성관계 동영상 유출의 피해 여성 A씨는 이 단어를 꼬리표처럼 여겨졌다. 그가 20대 초반에 찍힌 동영상은 OO녀, △△△녀 등 여러 제목으로 바뀌며 인터넷을 떠돌았다. 옛 남자 친구가 분명히 지우기로 약속했던 그 영상이 흉기처럼 A씨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녀’ 됐는데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동영상을 본 지인이 연락을 해오는 일도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괴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동영상 유포와 관련해 처벌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다. A씨는 동영상을 촬영한 전 남자친구 이모(31)씨가 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하지만, 검찰은 “유포를 인정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불기소 결정을 했다.

좌절한 그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 왔다. 법원이 유포 경위와는 무관하게 촬영물을 지우지 않은 전 남자 친구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기 때문이다. 동영상 유포와 별개로 영상 촬영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북부지법 민사6단독 박형순 판사는 지난 14일 영상 촬영자인 이모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A씨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영상을 삭제하며 살아가야겠지만, 조금이나마 힘 내보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손발이 떨렸다. 몇 년이든 견뎌서 이씨에게 꼭 벌을 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지웠다" 했지만…클라우드에 백업

법원 판결문과 검찰의 불기소 결정서 등에 따르면 사건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31일 A씨의 남자 친구였던 이씨는 A씨의 집에서 동영상 촬영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 이를 거절하던 A씨는 촬영 직후 삭제하는 것을 전제로 촬영에 응했다.

A씨는 이씨가 휴대전화에서 영상을 삭제하는 것을 확인했고, 몇 달 후 헤어지면서 삭제한 것이 맞는지 다시 물었다. 이씨는 “삭제했으니 걱정 말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4년 뒤에 세상에 공개된 영상

그런데, 그 영상이 4년 뒤 세상에 공개됐다. 2018년 9월 A씨의 얼굴이 노출된 영상이 불법 음란물 사이트에 올라왔다. A씨는 “유포자를 찾아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고, 한국여성인권진흥센터를 통해 동영상 삭제 지원도 요청했다. 센터는 영상을 찾아 계속 삭제했지만, 동영상은 수십 개 사이트에서 700여 차례나 올라왔다. 구글 검색만으로도 동영상 링크를 찾을 수 있다.

뉴스1

뉴스1

경찰은 촬영자인 이씨가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압수수색을 했고, 이씨의 구글 드라이브와 네이버 클라우드에서 성관계 장면을 찍은 영상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이씨는 휴대전화 촬영물이 자동으로 구글 드라이브에 올라가게 했고, 성관계 여성의 이름 영문 이니셜로 폴더를 만들어 사진과 영상을 보관했다. A씨 이름의 폴더도 있었고, 이씨가 보관하던 외장 하드에서도 같은 폴더와 영상이 발견됐다.

유포 혐의는 인정 안 돼

그러나 실제 이씨가 유포를 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초로 A씨 동영상이 올라온 사이트는 이미 폐지돼 업로더를 찾을 수 없었다. 이씨는 “해킹을 당한 것 같다”며 2018년 6월 구글에서 보낸 ‘중요 보안 경고 메일’을 증거로 제시했다. 의심스러운 로그인 시도가 있다는 내용으로 구글에서 보낸 것이다.

검찰은 이씨의 유포 혐의에 무혐의 결정을 내리는 대신 A씨 외에 3명의 여성을 몰래 촬영한 것에 대해 카메라등이용촬영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씨가 2015년 9월부터 2018년 5월까지 각각 3명의 여성이 자고 있을 때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 66개가 발견돼서다. 이씨는 불법촬영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민사 사건 재판부 “3곳 저장, 유출 결정적 원인 제공”

A씨는 “내 동영상은 분명 유포됐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변호사를 찾았다. A씨의 민사소송을 진행한 김수윤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는 “이씨가 영상을 약속대로 삭제했다면 없었을 일이라는 게 분명한데 해킹을 주장하면서 민사소송 결과까지 4년이 걸렸다"며 "삭제 합의를 위반해 유포에 원인을 제공한 자에 대한 첫 손해배상 책임 인정 사례"라고 설명했다.

서울 북부지방법원 [사진 연합뉴스TV]

서울 북부지방법원 [사진 연합뉴스TV]

이씨 측은 “이씨의 얼굴도 동영상에 등장한다. 똑같은 피해자”라며 “손해배상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박 판사는 “이씨는 완벽하게 삭제하기로 합의하고도 구글 드라이브·네이버 클라우드·외장하드에 저장해 해킹이나 분실 등으로 동영상이 유출될 수 있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며 “심각하게 부주의한 행동으로, A씨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