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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김웅 길이냐 이준석 길이냐, 갈림길에 선 보수의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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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저를 보수주의 정당으로 이끈 말은 ‘책임 없는 자유는 없고,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보수주의자다’였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노동자가 철판에 깔려 죽은 현장이고, 임대 전단지가 날리는 빈 상가이며, 삼각김밥으로 한 끼 때우고 콜을 기다리는 편의점이다.”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국민의힘 대표 경선서 두각 보이는 차세대 후보 김웅·이준석 #구체제의 복귀냐, 보수 혁신 통한 세대교체냐 결정할 갈림길 #김웅, 낮은 곳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며 ‘공동체주의’ 지향 #남성들 좌절·분노에 올라탄 이준석은 ‘공정한 실력주의’ 강조

보수혁신 리로디드(reloaded)

김웅 의원의 당 대표 출사표다. 그는 재·보선의 표심에 정면으로 응답했다. “우리는 정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낮은 곳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수이고, 그 실천이 진정한 변화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승리 공식은 바로 변화다.”

여기엔 이번 재·보선이 우리 사회에 제기한 과제에 대한 보수적 해법이 담겨 있다.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 보수를 자처하는 그이기에 그 ‘책임’을 지는 방식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것이나, 중요한 것은 목표의 공통성. 그것이 진영을 초월한 공감의 토대가 된다.

보수의 말에 끌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5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은 “보수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 명연설”이란 평을 들었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는 그로 인해 배신자로 몰렸다. 그 후 새누리당은 친박당으로 전락해 폭주를 거듭하다 결국 탄핵 사태를 맞는다.

김웅 의원이 모처럼 올바른 정치언설의 또 다른 모범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된 보수의 메시지는 중도는 물론 진보의 마음까지 끈다. 제대로 된 진보도 마찬가지리라. 누군가 특정 타깃 집단을 노려 성별·진영·국적 등으로 편을 가른다면, 그자는 진영에 관계없이 사이비로 보면 된다.

보수의 두 가지 미래

퍼스펙티브 5/19

퍼스펙티브 5/19

보수가 젊어지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출마를 고심하는 나경원 전 의원은 지난 경선에서 강경파를 겨냥해 ‘자장면’ 운운하다 중도에 더 친화적인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역전패한 인물. 주호영 전 원내대표 역시 무난하나 혁신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은 재·보선 표심과 관련해 딱히 던지는 메시지도 없다.

국민의힘은 영남(특히 TK)을 기반으로 한 정당으로, 아직 혁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홍준표·황교안 전 대표 등 구체제의 복귀를 원하는 이들도 많다. 당의 조직과 당원 구성이 혁신을 말하는 신인이나 청년에게 원천적으로 불리하여 지도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구조다.

어렵게 세대교체에 성공한다 해도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다. 대표 경선에서 초선인 김웅 의원과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보수 혁신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현상이리라. 흥미롭게도 이 두 주자의 노선이 전혀 다르다. 이는 차세대 보수의 두 가지 가능태를 보여준다.

김웅은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보수를 내세운다. 이는 김종인 비대위의 신(新)정강정책과도 합치한다. 반면 이준석은 ‘실력주의’를 말한다. 이는 전통적 ‘시장만능주의 보수’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 문제는 이 퇴행적 흐름이 젊은 보수층의 폭발적 관심을 받는다는 데 있다.

무한경쟁의 선동

이준석의 해법은 ‘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할 테니 각자 ‘실력’으로 해결하라는 것. 하지만 경쟁은 ‘개인적’ 해법이지 ‘국가적’ 해법이 아니다. 아무리 공정해도 경쟁의 승자는 소수, 패자는 대다수. 취업문 놓고 무한경쟁하는 이들을 ‘공정한’ 헝거게임으로 몰아넣는 게 해법이 될 리 없다.

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방법도 황당하다. 성평등지수 OECD 꼴찌인 나라에서 여성할당제와 가산점을 없애겠단다. 젊은이들이 당하는 고통의 근원이 할당제와 가산점인가? 사회구조적 문제를 ‘젠더’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그는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고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가 정말 젊은 세대를 대변해 왔을까? 구의역 김군, 평택항 이선호씨, 광양항 30대 부두 노동자. 수험도서가 꽂힌 책장이 있고, 그리고 희망의 말을 적은 포스트잇 메모가 덕지덕지 붙은 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을 위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마디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가 열정적으로 대변해 온 것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로 몰렸다는 한 남성의 억울함, “여성에게 무시당했다”며 화장실에서 5명의 남자를 그냥 보내고 6번째로 들어온 여자를 살해한 것을 ‘여성혐오’로 규정하는 여성계의 부당함(?)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분노다.

한국의 트럼피즘

미국 민주당의 실수는 이민자·성평등·성소수자 등 정체성 정치에 몰두한 것이었다. 문제는 정체성 정치 자체가 아니었다. 거기에 매몰되어 백인 하층민의 삶을 돌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 불만이 이주민과 소수자를 향한 백래시(반발 심리및 행동)로 표출됐고, 그 물결에 편승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

한국의 민주당도 비슷하다. 민생과 관계없는 ‘개혁’ 시리즈에 매진하는 사이에 취업은 어려워지고, 자산격차는 소득으로 메울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안 좋은 일자리를 놓고 여성들과 경쟁하는 처지가 된 젊은 하층 남성들이 그 좌절과 분노를 애먼 여성주의로 돌려 표출하는 것이다.

이준석이 그 물결에 올라탔다. 그가 젊은 남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결국 ‘백래시’와 ‘실력주의’(meritocracy)를 결합한 것. ‘너희들의 고통은 남성을 역차별하는 제도의 탓이다. 할당제와 가산점을 폐지해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 줄 테니 너희들은 자신의 실력으로 경쟁의 승자가 되라.’

특정 타깃 집단에 호소해 권력을 쥐는 방법인데, 그 수법으로 당선된 트럼프는 우리가 아는 ‘미국적 가치’를 모조리 파괴했다. 그의 통치는 결국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국회의사당 난입으로 막을 내렸다. 이어서 당선된 바이든은 뒤늦게 사회 양극화를 줄이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실력주의의 문제

‘실력주의’의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개인들에게 떠넘긴다는 데 있다. 그에게는 그 ‘실력’이 실은 부모의 능력이라는 사실의 인식도, 할당제 폐지로 공정해진(?) 경쟁에서 낙오할 절대다수를 위한 대책도 없다. 그저 “노오력”해서 성공한 소수에 들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는 가상화폐로 ‘출마할 돈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그 자금이 어쩌면 ‘공정한 경쟁’에 패해 목숨을 끊은 청년이 날린 그 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의 머리엔 떠오르지 않는다. 공정한 시장에서 ‘실력’ 있는 자가 ‘실력’ 없는 자의 돈을 따는 것이 그에게는 결과의 ‘정의’일 것이다.

그가 부추긴 ‘차이나타운’ 선동으로 투자가 취소됐다. 그로써 젊은 남성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을 고용이 사라졌다. 여성 할당이 부당하다면 같은 논리로 모든 할당이 부당할 게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누린 청년할당마저 없애려 한다. 이게 청년을 대변한다며 그가 실제로 해온 일이다.

백래시와 실력주의로 일자리가 생기지도, 자산 격차가 줄지도 않는다. 할당제 없앤 그 공정한(?) 경쟁에서 모든 ‘노오력’을 다해도 대다수 젊은이는 패배가 수학적으로 확정돼 있다. 그들은 나라 탓도 못하고 그저 ‘실력’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질 게다. 이는 어찌할 것인가.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백래시와 실력주의는 세계적 현상으로, 사실 우리 사회 저변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이 뒤늦게 이준석을 통해 ‘정치적 현상’으로 공식화한 것뿐이다. 마침내 한국에도 트럼피즘의 미니 버전이 등장한 셈이다. 겨우 아날로그 극우를 땅에 묻었더니 그 자리에 디지털 버전의 싹이 텄다.

대선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다. 거기서는 해방 후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못 살 거라는 암울한 ‘청년의 미래’가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여든 야든 후보와 정당은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요구받을 것이고, 유권자들은 그 대답을 듣고서 그 당의 수권 능력을 판단할 것이다.

야당의 갈림길. 하나는 “노동자가 철판에 깔려 죽은 현장, 임대 전단지가 날리는 빈 상가, 삼각김밥으로 한 끼 때우고 콜을 기다리는 편의점”으로 내려간다. 또 하나는 젊은이들을 부모가 마련해 준 ‘실력’이 있는 소수만 살아남는 ‘경쟁’으로 내몬다. 누가 대표가 되든 선택해야 할 게다.

김웅의 ‘공동체주의’와 이준석의 ‘실력주의.’ 젊은 지지층에선 정답보다 외려 오답의 선호가 더 높다. 차세대 보수도 앞길이 마냥 밝지는 않다는 얘기다. 잠수함의 토끼는 그저 임박할 위험을 경고할 수 있을 뿐, 국민의힘이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오롯이 지지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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