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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존귀한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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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제주에도 사찰과 거리 곳곳에 연등이 걸려 있다. 귤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고, 먹구슬나무에도 꽃이 매달렸고, 밤에는 연등에 불이 켜져 낮과 밤의 시간이 어느 때보다 모두 환하고 향기롭다. 자연의 활발한 움직임과 생기는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코로나 유행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크다.

붓다 탄생게는 존재의 존귀 말해 #분별심 버리고 관계의 평등 봐야 #붓다는 자비심이라는 뜻 새겨야

붓다의 탄생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사자처럼 말했다고 한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다. 온통 괴로움에 휩싸인 세상을 내 마땅히 안온하게 하리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큰 연꽃이 솟아 붓다의 발을 받들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다”라고 말했을까. 이 탄생게(誕生偈)가 아만(我慢)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닐 테다. 내가 존귀한 존재이고, 내가 내 삶의 주인공임을 알라는 뜻일 테다. 그리고 내가 존귀하듯이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존귀하다는 뜻일 테다.

불교의 경전에는 ‘홀로’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가령 널리 알려져 있듯이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이, 물에 젖지 않는 연꽃 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말씀이 있고, 또한 “진실하고 덕 높은 벗을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한 번 점령한 땅을 미련 없이 포기하듯 홀로 자유로이 살아가라. 큰 코끼리가 홀로 숲속을 거닐 듯이”라는 말씀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홀로’라는 말에는 모든 각각의 존재가 자유자재하며, 대자대비하며, 평등한 존재이니 스스로 주인공임을 알아 자존과 자립의 근거로 삼으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일 테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스님들의 법문을 듣는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춘성 스님의 일화는 내게 적잖은 생각을 하게 했다. 춘성 스님이 어느 날 왼쪽 발에는 검은 양말을, 오른쪽 발에는 흰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이를 본 젊은 스님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러자 춘성 스님께서 “두 발을 따로따로 봐야지, 두 발을 함께 보고서 분별심을 내느냐”라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고정관념을,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이 숨어 있다. 나와 너, 좋고 싫음의 분별심을 버리라는 말씀일 테다. 분별심이 사라지면 모든 관계의 평등을 보게 되는 마음을 얻게 될 것이고, 이 상태가 곧 본래 내 마음의 존귀한 상태일 테다.

법정 스님의 생전 법문도 이즈음엔 다시 생각이 난다. 스님은 ‘부처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지 말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 또 무엇을 위해 왔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비심이 곧 여래이고, 우리는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 무서운 세상을 그 어떤 힘으로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 자비심만이, 사랑만이 우리들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웃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함께 이르셨다. 이 자비심도 물론 내 본래 마음의 존귀한 상태일 테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지난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는 셰익스피어의 시 ‘소네트 18’이 소개된다. 참으로 멋진 시이다. “내 그대를 한여름 날에 비할 수 있을까?/ 그대는 여름보다 더 아름답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 오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빌려온 기간은 너무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내리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쇠퇴하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을 빼앗긴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자랑스레 그대를 그늘의 지하세계로 끌어들여 방황하게 하지 못하리./ 불멸의 시구 형태로 시간 속에서 자라게 되나니,/ 인간이 살아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게 되어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

이 시는 ‘그대’라는 존재를 한여름에 견준다. 여름은 짧고, 쇠퇴하고 말지만 그대가 지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의 쇠락은 우연에 의하거나 자연의 변화 때문에 회피하기 어렵지만, 그대의 아름다움은 불멸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그대’는 곧 고귀하고 평등하고 자유롭고 자비심이 충만한 본래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