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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땐 맞고 조국 땐 틀리다"?…'공소장 유출' 이중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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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범계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14일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공소장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것과 관련해 대검에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수사 외압’의 내용이 아니라 유출 경위에 날을 세운 것이다.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일제히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법무부 간부를 통해 이규원 검사에 대한 수사 무마를 요구했다는 공소장 내용을 보도한 이튿날이었다.

[현장에서] #박범계, 이성윤사건 유출 조사 지시 #국정농단 수사 땐 “국민 알 권리” #불리할 땐 수사정보 공개 막아 #“수사 생중계보다 깜깜이가 더 문제”

대검찰청은 부리나케 감찰1‧3과와 정보통신과 등을 투입해 검찰내부망 ‘이프로스’ 수사결정시스템의 접속 기록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13일 수사결정시스템에 올라온 공소장 내용을 열람한 전국 백여명의 검사들이 졸지에 조사 대상이 된 셈이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박 장관은 지난 3월 한명숙 전 총리 모해위증 의혹 기소여부를 논의한 대검 부장회의 표결 결과 유출 경위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고, 지난달엔 이른바 ‘청와대 기획사정 의혹’ 수사 상황이 언론에 유출된 경위를 살피라는 지시를 검찰에 내렸다. 이에 대한 법무부 대검 합동 감찰과 서울중앙지검과 수원지검에 대한 진상 조사가 각각 진행 중이다.

사실 ‘피의 사실 공표냐, 국민의 알 권리냐’는 문재인 정부 이전부터 검찰 등 수사기관과 언론의 오랜 논쟁 거리다. 그러나 적어도 청와대와 여야 정치인, 대기업 총수, 고위 공직자 등 살아있는 권력과 사회적으로 인정된 공인(公人)에 대한 언론 보도의 자유는 폭넓게 인정돼 왔다. ‘권력 수사가 생중계되는 것도 문제지만, 권력 수사는 ‘깜깜이’로 진행하거나 수사 정보를 통제하는 건 더 문제’(박준영 변호사 페이스북)라는 암묵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피의 사실 공표’를 처벌하는 경우는 드문 것도 같은 이유다. 아예 거짓이거나 명백히 악의적일 때만 처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구제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중앙포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중앙포토

이런 불문율을 바꾸려는 시도는 과거 두 명의 법무부 장관이 주도했다. 국정농단 사건과 사법행정권남용 수사가 끝난 시점과도 일치한다. 검찰이 문재인 정부의 살아있는 권력을 겨누기 시작할 때쯤이기도 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공소장 공개를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인 법무부 훈령 ‘형사사건 공개금지 규정’ 제정안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시절인 2019년 9월 만들어졌다. 시행은 조 전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던 그 해 12월 1일부터였다. 당시 야권에서는 민주당이 국정농단 때 검찰의 수사 내용을 취재해 쓴 언론 보도를 고스란히 활용했던 과거와 비교해 ‘내로남불’ 행보라고 비판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2월 한 발 더 나아가 이 규정을 근거로 국회가 요구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공소장 공개를 거부했다. 공소장 비공개 결정에 정의당은 “타당성 없는 무리한 (범죄) 감추기”라고 비판했다. 진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도 “법무부가 내놓은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 보호’라는 비공개 사유는 궁색하기 그지 없다”고 꼬집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해당 공소제기가 된 사건이 가지는 무거움을 제대로 헤아렸는지 의문”이라며 “해당 사건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청와대와 정부 기관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검찰이 수사를 거쳐 기소한 사안”이라고 짚었다.

‘국정농단’‧‘사법농단’ 등 적폐 청산 수사 때 매주 열리던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의 수사 브리핑도 법무부 훈령 시행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 형사사건공개금지규정 제28조에 따라 출석 정보의 사전 공개, 촬영‧녹화‧중계방송이 허용되지 않으면서 조 전 장관의 아내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는 물론 텔레그램 단체채팅방 ‘박사방’ 사건으로 구속기소가 된 조주빈도, 여러 재벌 총수들도 검찰 출석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일은 없게 됐다.

2016년 10월 검찰에 첫 소환된 최순실씨는 "국민 여러분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며 울먹였다. 몰려든 취재진과 시위단 속에 '프라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합뉴스]

2016년 10월 검찰에 첫 소환된 최순실씨는 "국민 여러분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며 울먹였다. 몰려든 취재진과 시위단 속에 '프라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합뉴스]

그러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는 본인 재판에서 “언제부터 포토존과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없어졌느냐”며 “조국 아내는 모자이크하면서 우리 딸은 20세에 얼굴을 공개했고, 손자까지 공개됐다”고 억울해했다. 지난 2016년 중앙지검 앞 몰려든 취재진에 벗겨진 신발 한 짝이 마침 이탈리아의 명품 프라다로 드러나 더 대중들에게 미움을 샀던 그녀의 항변이었다.

집권 여당의 남다른 이중 잣대는 정권 말기 한층 더 심해진 양태다. ‘한강 대학생 실종’, ‘세 모녀 살해범’, ‘손님을 살해한 노래방 업주’처럼 대중의 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의 경우 확인되지 않은 '피의 사실' 공표가 범람해도 이를 제지하거나 비판하는 이가 없다. 검찰 송치 등을 계기 삼아 피의자 생중계 인터뷰까지 친절하게 주선하는 일까지 있다.

옛 시인은 자조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라고. 박정희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김수영 시인의 1965년 작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다. 언론의 자유, 월남 파병 문제처럼 거대한 독재 정권의 탄압에는 맞서 싸우지 못하면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비겁을 시인은 “나는 얼만큼 작으냐. 정말 얼만큼 작으냐”고 되뇌었다.

군사독재 시절 ‘왕궁’과 맞서 싸운 경력을 훈장으로 여기는 현 집권 세력이 어떻게 ‘왕궁’ 관련 보도를 막을지만 골몰하는 상황을 ‘내로남불’ 아니면 무엇으로 표현할까.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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