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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 아끼다 아들 잡았다"…300kg에 뭉개진 스물셋 인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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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평택항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 씨의 부친 이재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청 앞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아들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 앞 컨테이너 모형에 꽃을 꽂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평택항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 씨의 부친 이재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청 앞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서 아들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 앞 컨테이너 모형에 꽃을 꽂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뒤늦게 이선호씨 죽음을 알게 됐다. 이런 죽음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차 직장인 최모(33)씨는 친구들이 모인 SNS 채팅방에 ‘청년노동자 고(故) 이선호(23)를 기억하자’는 취지의 글을 올리고 있다. 이씨의 비극은 현장에서 일하는 그에게도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는 “죽음의 무게가 다른 것도 아닌데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이제라도 아픔에 동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숨진 이선호씨 아버지 눈물 #“진상규명 먼저” 아직 장례 못치러 #SNS엔 ‘#이선호 #평택항’ 줄이어 #“또다른 선호 안나오게 방지책을”

“故 이선호를 잊지 말자”  

17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평택역 앞 광장에서 열린 고(故) 이선호 씨 산재사망 책임자처벌 진상규명 촉구 시민분향소 설치 기자회견에 앞서 관계자들이 고인을 기리며 묵념을 하고 있다. 뉴스1

17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평택역 앞 광장에서 열린 고(故) 이선호 씨 산재사망 책임자처벌 진상규명 촉구 시민분향소 설치 기자회견에 앞서 관계자들이 고인을 기리며 묵념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2일 경기도 평택항에서 화물작업을 하다가 숨진 이씨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온·오프라인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씨가 사망한 지 26일째인 17일 오전 11시 평택역 광장에는 이씨를 추모하는 시민 분향소가 설치됐다. ‘고 이선호군 산재사망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등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안전에 대한 투자도 없고,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는 기업과 정부 기관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오늘 아니면 내일 당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매년 노동자 2000여명의 산재 사망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다”라며 “최소한의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인스타그램에는 ‘이선호’ ‘평택항’ 등의 해시태그를 달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친구들에게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해달라고 요구했다는 30대 직장인 A씨는 “안타까운 사건에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아서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친구가 지난 10일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이날 오후 8만2000여명이 동의했다. 일부 시민과 친구들은 한강에서 숨진 의대생 사건보다이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덜한 현실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대학교 3학년인 이씨는 군 제대 후 코로나19로 등교가 어려워지자 아버지가 일했던 인력사무소에 나와 종종 일을 나갔다. 지난달 22일엔 평택항 부두 화물 컨테이너 날개 아래에서 나뭇조각 등을 치우는 작업을 하다 300㎏에 달하는 날개가 이씨를 덮쳤다.

아버지 “진상 규명” 촉구 

해군 2함대 사령부 앞. 이선호씨와 아버지 이재훈씨. 이재훈씨 제공

해군 2함대 사령부 앞. 이선호씨와 아버지 이재훈씨. 이재훈씨 제공

유족들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한 뒤 그를 보내주겠다는 생각에서다. 아버지 이재훈씨는 지난 13일 이씨 빈소가 있는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현장에 일당 10만원을 받는 안전관리 요원이나 신호수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사고는 안 났을 것”이라며 “그 돈을 아끼려다 아이를 잡았다”고 울먹였다.

고 이선호씨의 어릴 적 모습. 이재훈씨 제공

고 이선호씨의 어릴 적 모습. 이재훈씨 제공

아버지의 휴대전화에 아들은 ‘삶의 희망’으로 저장돼 있었다. 수학을 곧잘 했고, 선생님·공무원 등 꿈도 많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나쁜 짓만 아니라면 아버지로서 아들의 꿈을 다 밀어주겠다”고 다짐했던 아버지는 이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와 스스럼이 없었던 아들은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다고 한다. 나와도 살갑게 서로 장난치며 지냈다. 엄마 가게에서 매일 소주를 마시며 즐겁게 지냈는데…”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선호를 기억하자”며 사건의 진상 규명에 나섰다.

현행법상 일정 규모 이상의 컨테이너 작업을 할 때는 안전관리자와 수신호 담당자 등이 있어야 하지만, 당시 현장에는 그런 인력이 배정돼 있지 않았다는 게 대책위 측 주장이다. 이씨는 사고 당시 안전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원청업체인 동방은 “안전관리 소홀로 사고가 일어났다.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다”며 지난 12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러나 유족과 대책위는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유족에게 먼저 사고 원인을 설명하고 사과하지 않고 ‘보여주기용 사과’에 급급했다는 게 대책위의 주장이다.

채혜선·여성국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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