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절박한 네이버가 몸을 낮췄다

중앙일보

입력 2021.05.18 00:38

업데이트 2021.05.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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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왼쪽)과 서울대 전병곤 교수가 네이버 본사에서 네이버-서울대 AI 동맹을 설명하고 있다. 배경은 GPT-3 토대로 네이버가 발표한 논문이다. 김상선 기자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왼쪽)과 서울대 전병곤 교수가 네이버 본사에서 네이버-서울대 AI 동맹을 설명하고 있다. 배경은 GPT-3 토대로 네이버가 발표한 논문이다. 김상선 기자

"도와주십시오. "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네이버의 인공지능(AI) 플랫폼인 클로바 CIC 정석근 대표가 지난 4월 1일 이렇게 대면 보고를 하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GIO·글로벌투자책임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래, 고(Go)!"
네이버가 지금껏 인류가 풀지 못한 AI 관련 10가지 과제 해결을 위해 향후 3년간 서울대에 수백억 원을 투자하는 '네이버-서울대 초(超) 대규모(hyperscale) AI 공동연구센터'는 이렇게 막을 올렸다. 지난 10일 양측이 화상 협약식을 한 데 이어 이번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어찌 보면 기업이고, 또 어찌 보면 대학"이라는 장병탁 서울대 AI 연구원장 설명처럼 이번 네이버-서울대 동맹은 기업이 적당히 '물주' 노릇하고 대학은 숙제하듯 단기간에 실적 뽑아 제출하고 끝내는 기존의 국내 산학(産學) 모델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서울대 안에 위치하지만 참여하는 10여 명의 교수진과 50~60여 명의 석박사 과정 연구원들은 이미 네이버 직원과 똑같이 사번을 받았다. 네이버가 지난해 10월 수백억원 주고 국내 최초로 도입한 700 페타플롭(1페타플롭은 초당 1000조 회 연산처리) 슈퍼컴퓨터를 비롯해 연구에 필요한 네이버의 모든 인프라와 데이터에 무제한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하정우 네이버 AI 랩 연구소장을 비롯한 네이버의 박사급 연구진 30~40명은 서울대 겸직 교수 자격으로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대로 출근해 교수진과 교류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특허는 서울대의 지식재산권 관련 표준협약대로, 하 소장 표현으론 "서로 억울하지 않게" 권리를 나눠 가진다. IBM과 MIT가 같이하는 왓슨 AI 랩이나 교수진을 기업 내로 끌어들여 겸직시키는 페이스북 AI 리서치(FAIR)처럼 미국에선 흔한 모델이지만 국내에선 첫 시도다.

지난 10일 화상 협약식에 참석한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 최인혁 COO, 정석근 클로바 CIC 대표(왼쪽부터). 화면 속은 함종민 서울대 AI 연구원 산학협력센터장, 장병탁 원장, 전병곤 부원장. [사진 네이버]

지난 10일 화상 협약식에 참석한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 최인혁 COO, 정석근 클로바 CIC 대표(왼쪽부터). 화면 속은 함종민 서울대 AI 연구원 산학협력센터장, 장병탁 원장, 전병곤 부원장. [사진 네이버]

전경련에 따르면 국내 AI 경쟁력은 미국의 80.9% 수준, 기술격차는 1.8년 이상 벌어져 있다. 그런데도 하 소장이 "특정 기술은 우리가 가장 앞섰다"고 할 만큼 자부심 넘치는 네이버가 왜 굳이 대학에 손을 내밀었을까. 특히 고급 AI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으로선 핵심 인력이 업무시간의 상당 부분을 회사 밖에 쓰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도 네이버 최고위층은 왜 선뜻 동의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공동센터장을 맡은 하정우 소장(44)과 전병곤 서울대 AI 연구원 부원장(50·컴퓨터공학과 교수)을 비 오는 일요일 분당 네이버 본사에서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이버와 서울대의 결핍이 불러온 결합이었다. 정확히는 네이버에 없는데 서울대엔 있고, 서울대에 없는데 네이버엔 있는 핵심 요소가 둘의 만남을 불러 왔다. 하나라도 없으면 '구글을 앞서겠다'는 야심 찬 미래를 향해 한발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인재, 데이터, 그리고 슈퍼컴퓨터 말이다.
출발은 지난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16년 이세돌 바둑 프로 9단의 패배로 전 세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러닝 AI 알파고의 충격에 빠졌을 때와 같은 혁명적 사건이 또 벌어졌다. 일론 머스크도 초기 멤버로 참여한 미국의 AI 연구소인 '오픈 AI'가 만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자연어처리 인공지능 'GPT-3'의 탄생이다. 사람처럼,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람답게 말하고 글 쓰는 걸 구현한 영어 기반 AI다. 전 세계 AI 연구자들은 이를 토대로 연구를 시작했고, 그 중엔 네이버도 있었다. 실험을 거듭하길 두어 달. 하 소장은 마음이 급했다.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은 최고 수준의 한국어 AI 구현을 넘어 글로벌 리더십을 꿈꾸고 있다. 명함에 'Toward Global Leadership Let's Go Together'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하정우 네이버 AI 랩 소장은 최고 수준의 한국어 AI 구현을 넘어 글로벌 리더십을 꿈꾸고 있다. 명함에 'Toward Global Leadership Let's Go Together'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김상선 기자

'앞으로는 GPT-3 부류의 큰 스케일 AI를 가진 회사와 갖지 못한 회사로 나뉘겠다. ' 다시 말해 '이 정도 실력이 없으면 기술 종속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지속적 연구를 위해 네이버는 지난해 10월 GPT-3를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했다. 국내 기업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급을 보유한 곳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하드웨어는 갖췄으나 해소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했다. 사람이다. 네이버는 국내에선 연구 인력이 풍부한 축에 속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 핵심 인재는 100명 단위에 못 미친다. 구글의 1000여 명, 오픈 AI의 수백명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비슷한 시기 서울대 AI 연구원(2019년 개원)도 다르지만 같은 고민에 빠졌다. 전병곤 교수는 "AI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려면 학습을 시킬 방대한 데이터가 꼭 필요한데, 캠퍼스 안에선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장병탁 원장이 "한국 AI의 미래를 위해 첨단(데이터·슈퍼컴퓨터)과 첨단(연구인력)이 만나야 했다"는 말로 이번 공동센터의 의미를 설명한 까닭이다.
지난해 말 먼저 손을 내민 건 네이버였지만 성격 다른 두 집단이 일사천리로 협업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건 이처럼 양측의 절박함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학기 컴퓨터공학부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을 받은 서울대 출신으로 서울대가 뭘 잘하는지를 잘 아는 하 소장, 그리고 인텔·야후·마이크로소프트를 거치며 실리콘밸리식 산학협력 모델을 경험한 후 2013년 서울대에 합류한 전 교수가 실무를 맡아 속도가 더 붙었다. 첫 제안에서 협약식까지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전병곤 서울대 전병곤 교수. 네이버-서울대 AI 공동연구센터의 공동센터장이다. 김상선 기자

전병곤 서울대 전병곤 교수. 네이버-서울대 AI 공동연구센터의 공동센터장이다. 김상선 기자

하 소장은 "GPT-3가 학습을 위해 모은 5000억 개 데이터 가운데 92.7%가 영어일 정도로 철저하게 영어 기반 AI이다 보니 누군가 빨리 성능 좋은 한국어 AI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품질은 낮으면서 기술은 종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한국어 AI를 잘 만드는 게 1차 목표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한 차세대 AI를 개발해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는 게 장기적 목표"라고 했다.
가령 ▶인종·성별 등 편향성 해소 ▶신조어나 뉴스 등 최신 지식까지 동시 학습 ▶대규모 모델을 안정적으로 학습 ▶이미지·비디오·오디오 학습에 적용 등과 같은 네이버가 직면한 10가지 문제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앞선 AI 기업도 똑같이 겪는 난제들이다. 이중 편향성 해소가 가장 시급했다. 여성 혐오 논란 등으로 올 초 서비스 시작 19일 만에 퇴출당한 챗봇 '이루다'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AI 윤리 문제는 서비스에 앞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 소장은 "GPT-3 이전만 해도 AI 성능이 이렇게 안 좋은데 무슨 윤리 타령? 이렇게 비웃고 마는 수준이었다"며 "GPT-3를 써보니 성능이 너무 좋아 당장 윤리 문제가 걱정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 연구 실적을 내는 서울대의 인재를 끌어들인 거다. 네이버-서울대 공동센터가 한데 모은 100여 명의 초일류 연구진이 3년 내에 이를 해결하면 영어 기반 AI뿐만 아니라 이미지 학습 등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해 격차 축소가 아니라 단숨에 추월도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결코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하 소장은 협업 전 명함에 '함께 글로벌 톱10 AI 회사로 가자'는 문구를 넣었지만 최근 판명함엔 'Toward Top Global AI Leadership Let's Go Together(글로벌 AI 리더십을 위해 함께 가자)'라는 문구로 바꾸었다.
지금 네이버와 서울대가 꾸는 장밋빛 미래와 달리 주변 시선이나 환경은 꼭 긍정적이진 않다. 네이버는 "한국의 AI 생태계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글로벌 테크 기업에 기술 종속되는 걸 피하겠다는데 만약 이 시도가 성공하면 다른 국내 기업은 네이버에 의한 기술 종속을 걱정할 수밖에 없어서다.

알파고 후 세계는 GPT-3 혁명
인재 부족 한국, 격차 못 좁혀
수백억 슈퍼컴도 못 푼 인재난
돈·조직 결합 산학 모델로 풀어

데이터 관련 불안은 또 다른 문제다. 하 소장은 "네이버는 하루 돈 벌고 끝낼 생각이 없기에 지속가능성을 해치는 비윤리적 작업은 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페이스북의 개인정보를 정치적으로 사용해 문제가 된 케임브리지 애널리틱스 사태 탓에 의구심은 여전하다. 네이버 입장에선 크지도 않은 나무에 물을 주는 대신 가지치기(규제)부터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전 교수는 "네이버 윤리 준칙도 따로 있지만, 공동연구를 통해 서울대가 게이트키퍼 역할을 더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꿈의 동맹이 한국에선 왜 이제야 나왔을까. 협약식 발표 후 주요 대기업 AI 실무진들은 네이버에 기회를 빼앗겼다며 질책받기도 했단다. 하지만 네이버는 네이버라서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기업이 매출과 직결한 단기 성과로만 움직이면 장기적 기초연구 중심 대학과 결합이 어렵다. 네이버의 연구 개발 투자는 대학의 핵심성과지표(KPI)와 같아 가능했다. 기술·돈뿐 아니라 유연한 조직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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