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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당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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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해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당신’의 뜻은 다섯 가지다. ①듣는 이를 가리키는 말 ②부부 사이 상대편을 높이는 말 ③문어체에서 상대를 높이는 말 ④맞서 싸울 때 상대를 낮잡아 이르는 2인칭 대명사 ⑤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

낮춤과 높임이 동시에 있는 이 단어는 종종 논란을 부른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이해찬 민주당 의원은 “국정원과 단절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달라. 그래야 당신의 정통성이 유지된다”고 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당신’ 운운한다”며 비판했지만, 민주당 서울시당은 “자리에 없는 이를 ‘당신’이라 하면 3인칭 존칭 대명사다. 청와대 홍보수석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정치를 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고 맞받아쳤다.

지난 14일 국회 본회의에서도 당신이란 단어로 촉발된 사건이 벌어졌다.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의사진행발언에서 자진사퇴한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겨냥해 “외교행낭을 이용한 부인의 밀수행위는 명백한 범죄”라고 했다. 본회의가 끝나자 문정복 민주당 의원이 배 원내대표 자리로 가 항의했다. 문 의원 입에서 ‘당신’이란 말이 나왔고, 곁에 있던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표현을 문제 삼으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문 의원 : “야, 어디서 감히!”

류 의원 : “우리 당이 만만해요?”

정의당 대변인은 민주당의 사과를 촉구했으나 문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정의당에 유감을 표했다. 문 의원은 한 언론에 “당신은 박 후보자를 지칭한 것이다. 해프닝인데 표현을 이해 못 했거나 알면서도 그런 것 아니겠냐”고 했다. ⑤번 의미로 썼기에 문제없다는 뜻.

정말 문제없을까? 당신이 3인칭으로 쓰일 땐 주로 극존칭의 의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⑤의 예문으로 ‘아버지는 당신께서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도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고는 참지 못하신다’를 들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한 구절이다. 국민 손으로 뽑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 스스로 사퇴한 장관 후보자를 본회의장에서 극존칭을 써가며 옹호하는 것이 과연 국민 정서에 맞는 일인가? 젊은 의원에게 고성 들은 사실에 화내기 전, 문 의원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국어가 너무 어렵다면 말을 아끼는 것 또한 방법이다.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