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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매일 만보 걷기…변화무쌍한 ‘생물’ 동네의 발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5)

지난 1월이었다. 우연히 지구 반대편의 언니와 ‘만보 걷기’를 시작했다. 매일 걷고, 서로의 카톡에 걸음 수를 인증하는 자매끼리의 리그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이곳의 아침을 걷고 있을 때, 언니는 집 앞의 노을 지는 풍경을 보내왔다. 서로의 물리적인 거리를 실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함께 걷는 듯한 우리만의 친밀감이 있었다.

운동이라면 숨쉬기 운동이 최고라고 하던 인간이 1월 추위 속에 갑자기 그렇게 매일 만보를 ‘걸어댔다’. 처음엔 걷는 자체가 힘들어 죽겠고, 그다음엔 발바닥이 너무 아파 다음날까지 힘들었다. 그 단계를 모두 거치고 나니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 걷기에 진심이 되었다. 어쩌다 하루를 걷지 않으면 걷고 싶어지는 경지(?)까지 이르렀으니 놀라운 일이다.

지구 반대편의 언니와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걸음 수를 인증하고 걷는 풍경을 공유하다 보면 함께 걷는 듯한 친밀감이 든다. [사진 전명원]

지구 반대편의 언니와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걸음 수를 인증하고 걷는 풍경을 공유하다 보면 함께 걷는 듯한 친밀감이 든다. [사진 전명원]

매일 혼자 걷는 것은 단조롭다. 운동복에 공을 들일 몸매도 아니니 요즘 유행하는 멋진 운동복에는 눈길이 가지도 않았다. 대신 단조로운 걷기에 재미를 더하게 된 것은 나만의 루트 짜기였다. 집에서 나가 돌아오기까지 대략 만보가 나오는 루트를 여러 가지로 짰다. 집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갔다 되돌아오기, 동심원 혹은 방사형 모양으로 루트 짜기 등등 새로운 길을 가는 재미가 꽤 좋았다. 생각보다 만보는 엄청나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결국은 집을 중심으로 동네가 조금 더 확장되는 것이랄까. 그러다 보니 수십 년을 살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동네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

북쪽으로 걷다 보면 주택가 안쪽으로 커다란 보호수가 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늘 걷다 멈춰 서서 눈인사를 했다. 보호수를 가운데 두고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부분 오래된 집들 사이에 새로 지은 듯한 원룸주택이 모여 동네를 이룬다. 늘 차로 지나칠 땐 그 골목 안의 보호수도, 보호수를 둘러싼 주택가의 풍경도 알 수 없었다.

서쪽은 커다란 공원을 지나 상업 지구를 이루고 있다. 상업지구 안쪽에 꽃을 싸게 파는 집에서 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오기도 한다. 어쩐지 꽃을 들고 올 때면 부끄럽다. 우리에게 꽃은 특별하다. 여행을 갔던 런던의 코번트가든에선 길 여기저기서 꽃을 팔고 있었다. 특별하게 포장해서 주는 것도 아니었다. 꽃은 그들에게 일상인 듯 느껴졌다.

봄이 되니 원천리천변을 따라 버드나무 그늘이 푸르게 드리웠다. 봄이 오는 원천리천변을 걸으면 내내 마음이 평화롭다.

봄이 되니 원천리천변을 따라 버드나무 그늘이 푸르게 드리웠다. 봄이 오는 원천리천변을 걸으면 내내 마음이 평화롭다.

동쪽은 원천리천변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원천리천의 물이 맑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탁한 물에서도 물고기들은 수면위로 펄쩍 뛰었고, 새들은 치어를 잡아먹는다. 봄이 되니 물가에 버드나무 그늘이 푸르게 드리웠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처럼, 풍경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비릿한 물 냄새가 살짝 올라왔지만, 봄이 오는 원천리천변을 걷는 오후엔 내내 마음이 평화로웠다.

요즘 걷고 있는 루트는 남쪽을 향한다. 택지지구로 지정되어 아파트 분양을 시작할 즈음 근방에 모델하우스가 가득했었다. 놀이 삼아 구경삼아 모델하우스들을 찾아다니던 그 자리엔 이제 아파트 단지로 가득하다. 계획개발을 한 지역이라 길이 넓고, 산책로도 반듯하다. 게다가 산책로 주변의 나무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하늘을 가릴 만큼 자라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남쪽 산책로의 사진을 보내주었더니 언니가 말했다. “걷고 싶어지는 길이네! ” 나도 그 길을 걸을 때면 늘, 언니와 함께 걷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로 지구 반대편 오전의 햇살과 저녁의 노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오전의 햇살과 저녁의 노을 속을 걷고 싶다고 말이다.

삼십 년 살아온 동네를 걸으면 옛 생각이 난다. 늘 변함없는 것 같지만 동네는 유기물처럼 변하고 있다.

삼십 년 살아온 동네를 걸으면 옛 생각이 난다. 늘 변함없는 것 같지만 동네는 유기물처럼 변하고 있다.

나는 이 동네에서 참 오래 살았다. 대학 4학년 때 처음 이사 온 집 앞은 논이었다. 백로들이 날아와 푸른 논에 그 흰 자태를 드리울 때면 넋 놓고 보기도 했었다. 결혼한 이후에도 근처에 살았으므로 동네가 바뀌는 모습을 계속 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넓고 푸르던 논의 저 끝자락에서부터 매일 조금씩 흙이 밀려들 듯 메워졌다. 택지개발사업의 이름으로 집이, 아파트가, 건물이 들어섰다.

하루에 만보씩 걸으며 내가 삼십 년을 살아온 동네를 걷는다. 이쪽은 모두 논이었지, 이쪽엔 작고 허름한 집 몇 채뿐이었어. 혼자 옛 생각을 하며 걷는다. 내가 삼십 년을 살았고, 지금의 모습뿐 아니라 예전의 모습도 기억하는 내 동네. 동네는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또 어떤 면에선 생명이 있는 유기물처럼 끊임없이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래 전부터 있던 가게를 만나면 오래된 이웃인 듯 정겹다.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반갑고, 한동안 있던 가게가 어느 날 갑자기 간판을 내리고 없어질 땐 서운하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동네를 탐험한다.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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