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선데이 칼럼] ‘남혐’은 페미니즘의 장르 이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36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30여 년 전 ‘선희의 가방’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막 수습을 마치고 초년병 기자로 좌충우돌하던 때였다. 당시 회사에서 선배들은 나와 마주치면, 인사 대신 “선희야~ 가방을 왜 쌌니”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내 주제가가 된 건 수습이 끝난 후 1년 반 동안 다섯 차례나 부서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인사철도 아닌데 단독 인사가 난 것만 두 차례. 사회부 사건팀과 다른 부서를 핑퐁 치듯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은 무슨 ‘봉숭아학당’ 같은 얘기냐 싶지만, 당시엔 여성을 사회부로 발령 내는 문제로 공방이 벌어졌다.

페미니즘이 지향한 건 평등 사회 #혐오·적대 아닌 포용이 진짜 정신 #대결로 오염된 페미니즘 벗어나 #함께 잘사는 휴머니즘 지향할 때

“왜 여자를 굳이 사회부에…”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을 때, 나는 내근 취재부서로 갔다. 그리고 “여성 사건기자도 한번 키워보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을 때 경찰기자로 갔다. 경찰기자로 내가 첫 밤샘 야근을 하던 날, 편집국장은 새벽에 두 차례나 전화했다. “별일 없느냐”가 용건의 전부였다. 편집국장은 밤새 일어나는 사건도 챙기나 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린 얘기는, 그날 국장은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집 밖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내 문제를 놓고 핑퐁을 쳤던 양 당사자들도 스스로 ‘관습적 불안감’을 감수할 것인지 미연에 방지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나도 그 속에 내 자리를 마련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들도 돌출처럼 나타난 여성 동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적응과 탐색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 적응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간 덕분에, 당시엔 심각했던 여성 사회부 기자 같은 문제가 지금은 전설 같은 얘기가 된 것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페미니스트다. 애당초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행태와 사회적으로 강요된 성역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젊은 시절 ‘성평등’은 내게 가장 큰 주제였고, 남성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겠다는 목표는 인생의 과제였다. 그런 내가 사회에 나오자마자 이런 꼴을 당했지만, 남성이 내 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극복해야 할 적은 ‘제도와 관습’이라는 거대한 벽이었다.

선데이칼럼 5/15

선데이칼럼 5/15

원래 사람은 제도와 관습의 눈으로 자신과 상대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대부분은 그 틀 안에 안주해 자신을 단속하며 성실히 주어진 역할대로 산다. 그러다 보니 개중엔 가부장적 ‘마초’의 성역할에 몰입한 허접한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장벽까진 안 돼도 장애물이긴 했다. 장애물 피하기 게임처럼 때론 고난이도의 장애물이 나타나 애를 먹기도 하지만, 그걸 해결하면 게임 그레이드가 상승하듯 개인적 성장도 경험한다. 사회적 역할극에 몰입하는 건 남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들도 시어머니, 시누이 등의 고정관념화된 역할에 몰입해 타자의 인생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사례도 흔하다. 이 모두는 그저 인간의 습성이며,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잘못된 제도와 관습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발전한다. 우리에겐 그런 역할을 했던 여성과 남성이 있어서 그나마 조금씩 진전된 오늘을 맞은 것이다. 페미니즘은 수적으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마이너리티로 전락했던, 이상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평등한 삶의 가치’를 발견했고, 이로써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도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소수자 운동으로, 사람뿐 아니라 환경과 동물 등 지구의 생명체 모두를 포용하고 보호하는 운동으로 확산되는 맹아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항과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혐오’는 페미니즘의 장르에는 없는 것이다. 혐오는 덜 떨어진 우월주의자 혹은 열등감 환자들의 찌질한 감성이다. 폭력으로 이어지는 통에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혐오와 짝을 이뤄 다닌다. 한 편의점 업체의 포스터가 남혐 논란에 휩싸였다기에 봤지만 그게 왜 남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젊은 친구들이 손 모양이 남혐의 표시라거나 별과 달이 여성단체의 상징이라고 해석해줬다. 이 말에 골수 페미니스트인 나조차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모든 생명이 똑같이 존엄하게 함께 살자’는 것이지 적대하자는 게 아니다. 여혐이 먼저이고, 남혐이 나중이라 해도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건 품위 없는 일이다.

왜 남녀는 대결하게 되었을까. ‘기승전정치’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상황은 페미니즘이 정치에 이용당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지난 보궐선거 결과를 문재인 정권의 페미니즘 노선에 이대남들이 돌아섰다고 분석한 걸 보고 기가 막혔다. 이 정권이 진정 페미니즘 정권인가. 도대체 20대 여성이 덕 본 건 무엇인가. 페미니즘을 표방하며 여성표만 거둬가고, 남성의 피해의식을 자극해 성 대결 국면만 날카롭게 한 것뿐이다.

인간 세상의 문제는 종합적이다. 가부장제의 잘못을 지금 젊은 남성이 보상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남성을 희생시켜 여성에게 보태주는 제로섬 게임이 페미니즘 정신도 아니다. 비명이 큰 건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성 소외 문제도 작지 않다. 오염된 페미니즘에 이용당하기보다 ‘함께 잘 살자’는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려면, 이젠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으로 노선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