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장미희와 갔던 LA 잡화점, 30년 전 화투 열목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2021.05.15 00:25

업데이트 2021.05.15 01:28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2〉 음악·미술의 뿌리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조영남씨. 2008년 용인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2주기 추모전에 나란히 작품을 출품했다. [사진 조영남]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조영남씨. 2008년 용인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2주기 추모전에 나란히 작품을 출품했다. [사진 조영남]

나의 쎄시봉 친구 이장희의 노래 중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노래가 있다. 자기 콘서트의 끝부분에 배치해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남달리 비장하다. 말하자면 이장희의 인생 최대의 철학적인 노래이다.

오페라 어깨너머로 배워 완벽 소화
‘유정천리’‘청춘의 꿈’ 감동받아 외워

미술 대표로 군 대항 사생대회 나가
고교 시절엔 음악 아닌 미술부장

배우 장미희 “화투 그림 가르쳐달라”
LA 체류할 때 함께 작품 만들기도

나는 참 공교롭게도 장희가 이 노래를 막 작곡해서 연습할 때부터 익히 알게 됐는데 그땐 쎄시봉 멤버 모두가 LA에 모여 역사적인 공연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30여 년 전의 얘기다. 나는 그때 미국 LA 이장희의 카페 로스가든에 딸린 아파트에 두 달 이상 머물러 있었는데 딱 한 가지 장희가 걸핏하면 통기타를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 ‘나는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장희는 조용하게 연습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친구다.

부친의 금연 글씨, 달력 껌 자국 등이 팝아트    

노래의 시작은 낮은 톤으로 정중하게 잘 나간다. 후반부에 접어들면 끔찍한 아우성으로 돌변한다. 헤비메탈 뺨치는 긴긴 아우성이다. 그걸 논스톱으로 몇 번씩이나 반복한다. 옆에서 듣는 사람은 말 그대로 고통이다. 나는 그래도 형 자격으로 시끄럽다고 핀잔을 줄 수 있지만 그때 같이 기거하던 송창식이나 그때는 건강하게 살아 있던 착한 조동진이나 사진쟁이 김중만 같은 친구들은 꼼짝없이 장희의 ‘나는 누구인가’를 들어줘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장희가 먹여주고 재워줬기 때문이다.

나는 시끄럽다고 장희를 구박했지만 장희가 퍼부어대는 나에 대한 구박도 만만치가 않았다. 장희의 미국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모든 멤버가 나한테 집중포화를 던지곤 했다.

“형! 왜 멀쩡한 화투를 잘라 놓고 뭘 한다고 이렇게 방을 어질러 놓는 거야.”

녀석들은 내 소중한 작품 재료들을 발길로 툭툭 차며 투덜댔다.

“이게 무슨 미술이야. 왜 멀쩡한 화투를 조각조각 잘라 내는 거야. 아깝지도 않아? 빨리 집어쳐. 이걸 누가 알아준다고 밤낮없이 화투를 자르는 거야? 형! 정신 차려.”

나는 날이면 날마다 이런 구박을 받으며 그냥 속으로 ‘두구 봐라. 이 시키들아! 느이들두 나의 화투 그림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올 것이다’ 하면서 참아내곤 했다.

그 폭풍 같은 구박 속에서도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여자였다. 지금은 명지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여배우 장미희가 LA에서 체류하던 때였다. 장미희만은 나의 화투 미술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나의 화투 작품을 지켜보다 하루는 “오빠! 나도 화투 작품 하고 싶은데 가르쳐주지 않을래?” 해서 나는 즉시 “좋아, 이건 보기보다 훨씬 쉬워. 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하면서 한인들이 LA에서 운영하는 잡화점으로 화투를 사러 갔다.

1980년대 초반 미국 LA에서 만난 장미희씨와 조영남씨. 사진을 활용한 조영남씨 미술작품의 일부다. [사진 조영남]

1980년대 초반 미국 LA에서 만난 장미희씨와 조영남씨. 사진을 활용한 조영남씨 미술작품의 일부다. [사진 조영남]

나와 장미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투를 발견, 열 목쯤 집어서 카운터에 올려놨다. 어! 그런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수상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장을 보던 한국인들이 유명 여배우와 유명 가수를 알아보고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는데 우리 둘이 하필 화투만 한두 목도 아니고 열 목씩이나 구입해가니 저들은 속으로 그랬을 것 아닌가. ‘어머! 저것들이 고스톱을 얼마나 좋아하길래 화투를 저렇게 많이 사갈까?’ 그렇다고 카운터한테 “우린 화투를 치는 게 아니라 화투로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겁니다” 하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 그냥 뭇 시선을 무시하며 화투를 사 들고 와 작품을 만들었다. (미희야! 언제 한 번 만나 회포를 풀자. 장희도 데리고 나갈게!)

장희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사실 나는 ‘나는 누구인가’, ‘조영남은 누구인가’를 자문자답하기 위해 먼저 장희 얘기를 꺼냈던 거다.

나는 가수다. 그럼 어쩌다 가수가 됐는가. 그건 나도 모른다. 가수가 될만한 싹이 있기나 했나?

바야흐로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나는 오페라 아리아를 학교 학예회에서 완벽하게 불러 젖혔다. 하루는 우리 반 이숙원 담임 선생님이 날 더러 “얘! 영남아, 이번 학예회에 구호물자 배급소 외국 직원들이 구경 온다는데 니가 요즘 부르는 그 ‘오돌치’를 한 번 부르렴” 해서 그냥 불렀던 거다. 그건 당시 숭실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나의 조영걸 형이 방학 동안 우리 집에 돌아와 흥얼거리던 이상한 노래를 어깨너머로 그냥 따라 했던 건데, 외국 손님들은 오! 마이갓 하며 이런 시골 깡촌 어린아이가 어쩜 그렇게 푸치니 작곡 오페라 ‘토스카’의 주제곡으로 알려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을 저토록 잘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기겁을 했던 것이다. (※‘별은 빛나건만’ 안에 ‘오돌치(O dolci)’라는 가사가 나온다) 나중에 음대에 들어와서 내가 어릴 때 익혀뒀던 그 노래가 멜로디 음정 박자 발음 등 단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았으니 나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었다. 그럼 오페라 전문가수나 성악도가 될 것이지 웬 팝음악 쪽으로 삐져나오게 됐는가.

‘오돌치’를 영걸이 형의 어깨너머로 배울 때쯤이었다. 새벽 잠결에 우리 집 옆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던 ‘가련다 떠나련다’라는, 한국 초기 가요의 대표곡 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선배님이 부른 ‘유정천리’라는 노래 때문이다.

그럼 그 노래는 누가 불렀느냐. 그 노래는 털불네 과수원 뒤 언덕 아래에 살던 나의 초등학교 2년 선배님들, 그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을 포기하고 광밥(옛날에 우리는 쌀떡을 말려 잘게 썬 다음 그걸 뻥! 튀겨 만든 과자를 광밥이라 불렀다)을 만들어 자루에 가득 넣어 산타처럼 짊어지고 오일장을 찾아 나섰는데, 두 선배님들의 말하자면 이중창이었다.

그때는 유행가가 나쁜 노래로 어린 학생은 불러선 안 된다고 배웠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유행가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 저런 노래도 맘껏 불러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어린 내 마음을 녹인 노래는 또 하나 있다. 5일마다 서는 삽다리 장날만 되면 학교 공부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갔던 장터 약장수 아저씨가 고물 기타를 치며 부르는 “청추운은 보옴이요 봄은 꾸움 나아라 빰빠라 밤빰빰빰~”, ‘청춘의 꿈’이었다.

나는 약장수의 노래에도 너무나 감동했다. 어떤 땐 예쁜 여자 가수도 데려올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언니한테 홀딱 빠져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트럭에 짐을 싸서 장터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클래식 ‘오돌치’나 트로트의 대표곡 ‘유정천리’를 동시에 외우고 있었으니 천상 클래식 팝 트로트를 후뚜루 마뚜루 다 부를 수 있는 얼치기 잡탕 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수가 됐으면 노래나 부를 것이지 웬 미술이냐.

나는 평생 변변한 직함을 못 가져봤다. 그런데 딱 하나가 있다. 시골서 올라와 서울 용문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음악부장이 아니고 미술부장이었다. 그거 가지곤 약하다구?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김충세와 쌍벽을 이루는 미술 대표로 군 대항 사생대회에도 나가곤 했다. 예산농고(예산농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됐다가 1992년 공주대와 통합돼 폐교) 뒷산이 경연대회장이었다. 나중에 김충세를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충세는 남산 쪽 노란색 교복을 입고 다니는 리라국민학교 미술주임 선생이 되어 있었다. 내 그림을 보고 그걸 그림이라고 그리냐 맹 비판한 최초의 미술비평가였다. 실사주의로 그림을 그렸던 충세의 눈엔 팝아트는 그림도 아니었던 거다.

자! 그럼 아카데믹하게 미술의 뿌리를 찾아보자!

화투놀이를 친히 가르쳐주었던 나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중풍에 들어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고 그날부터 내 눈에 박혀 평생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금연(禁煙)이라는 빨간 크레용으로 쓴 글씨는 병의 원인이 술 담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손수 크게 써서 머리맡에 붙여 놓은 것이었는데, 내 눈에는 그게 글씨가 아니었다. 위대한 그림이었다. 팝아트의 정수였다.

백남준과 그의 부인 구보타와 절친  

바로 그 옆에 붙어 있던 달력도 예술이었다. 지역 국회의원 후보들이 매년 선전용으로 보내주는 후보의 얼굴이 가운데 박힌 한장짜리 큰 달력이었는데 달력이 붙어 있는 벽면 전체는 완벽한 팝아트였다. 달력 주변으로 껌을 붙였다 뗀 자국들, 우리 때는 껌을 씹다가 아까워 벽에 붙였다 필요할 때 다시 떼어먹곤 했는데 그래서 벽에 남은 희끗희끗한 자국들, 거기에 ‘영수 바보’ 같은 각종 의미 없는 낙서, 그리고 무엇보다 빈대를 눌러 죽였을 때 생기는 피 튀긴 자국들은 추사 김정희의 사군자나 잭슨 폴록의 뿌려서 그리는 추상회화 뺨치는 완벽한 팝아트였다.

벼룩은 동작이 빠르게 팔짝팔짝 뛰어 잡기가 힘들지만 속도가 느린 빈대가 벌벌 벽을 타고 오르면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피를 내뿜고 죽는다. 냄새도 특이하고.

나는 돌아가신 백남준과 그의 부인 구보타까지 절친했는데 두 사람은 플럭서스 그룹에서 미술 활동을 함께 하다가 결혼했다. 구보타는 행위미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그 중의 압권은 미술전시회 때 관람객 앞에서 다리 사이에 붓을 꽂고 흰 종이 위에 붉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버자이너 페인팅’을 실연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이 사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이 사냥은 내 인생 최대의 행위 미술이었다. 시골에서 목욕을 거의 안 하고 살았으니까 이가 끓을 수밖에 없다. 긴긴 겨울밤 작은 누나와 나는 속옷을 벗어들고 이 사냥에 나선다. 이는 그 크기에 따라 죽는 소리도 다르다. 작은놈들은 작은놈대로 탁! 소리를 내고 좀 큰놈들은 자연 큰 소리를 내며 화형당하는 거다. 우리가 이를 발견하면 호롱불에 갖다 대기 때문에 스스로 팽창하다 탁! 소리를 내며 터진다. 화형처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의 새끼들을 서캐라고 불렀는데 서캐들은 옷깃 사이사이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마치 뮤지컬 코러스 라인의 댄서들처럼 백색 찬란한 유니폼을 입고 막이 열리기를 대기하는 상태에 있다. 그걸 조심스럽게 호롱불 기둥에 갖다 대면 ‘타타타타’ 중공군 따발총 소리를 내며 자멸한다. 김국환의 ‘타타타’는 저리가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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