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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7] 출판사도 이름 빌린 북한산 하루재…”몸과 마음 꼭 다잡는 고개이니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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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호 24면

“인수봉 정상에 커피 자판기 있다니까.” “그래? 카드도 되나?”

■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7> #백운대·인수봉·영봉…길은 널려 있어 #어디로 향할 것인가 선택은 자신의 몫 #30㎡ 아담한 고갯마루는 원대한 도량 #우이동에서 하루재·도선사 향하는 도로 #육영수 시주설 속 ”청담 스님 공사 총괄” #

고갯마루에서 중년의 남녀가 이런 믿지 못할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청년 셋이 마스크 안에서 거친 숨을 토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자 “아, 잠깐만.” 그리고 숨을 고른 뒤 대답한다. “백운대.” 말이 짧다. 이해한다. 힘드니까.

북한산 인수봉에서 바라본 하루재. 맨앞 능선 중 가장 깊게 팬 곳, 즉 바위 투성이인 영봉 바로 오른쪽 안부가 하루재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인수봉에서 바라본 하루재. 맨앞 능선 중 가장 깊게 팬 곳, 즉 바위 투성이인 영봉 바로 오른쪽 안부가 하루재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일 북한산 하루재. 이곳은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백운대(836m)를, 가장 짧은 코스로 갈 때 거쳐야할 고개다. 하루재 이웃에서 백운대 접근로로 쌍벽을 이루던 깔딱고개는 사실상 폐쇄됐다.

하루재는 해발 490m에, 30㎡쯤 되는 아담한 고갯마루를 이룬다. 세 그룹 여섯 명 모두 배낭을 내린다. 그리고 하루재 특산물인 바람을 맞이한다. 몸과 마음을 내려놓았다가 다잡는다.

하루재에서는 이래야 한다. 아직도 백운대까지 직선거리로 870m, 인수봉(811m)까지 620m 남았으니까. 하루재 가는 길은 도선사 가는 길과 4㎞ 겹친다. 북한산 백운대탐방지원센터(혹은 도선사 주차장)에서 길은 절과 산으로, 사람은 신도와 등산객으로 갈라진다.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 풍경. 영봉, 백운대·인수봉, 도선사 가는 길을 나누는 삼거리다. 위쪽 깔딱고개 방향은 보호구역으로 묶여있는데, 시살상 영구 폐쇄됐다. 김홍준 기자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 풍경. 영봉, 백운대·인수봉, 도선사 가는 길을 나누는 삼거리다. 위쪽 깔딱고개 방향은 보호구역으로 묶여있는데, 시살상 영구 폐쇄됐다. 김홍준 기자

오는 19일은 석가탄신일. 신도와 등산객 몰릴 이곳을 불교 용어를 빌려 미리 찾아가 봤다.

# 야단법석
“하루재는 예전 우이동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려 하루 들여 오고갔기에 생긴 이름이죠.”

이용대(84)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의 말이다. 그는 60년 넘게, 지금도 하루재를 넘나든다. 하루재의 어원은 또 있다. 1941년에 생겨 1968년에 사라진 돈암동 전철 종점에서 이곳까지 ‘하루 걸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어쨌든, 지금은 하루를 쏟아 붓지는 않는다. 도로와 철로가 그 시간을 줄였다. 돈암동에서부터는 이제 한 시간이다.

1970년대 북한산 영봉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는 등산객들. 하루재는 영봉과 깔딱고개 능선을 가로지른다. [사진 김원식]

1970년대 북한산 영봉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는 등산객들. 하루재는 영봉과 깔딱고개 능선을 가로지른다. [사진 김원식]

1970년대 북한산 깔딱고개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등산객들. 하루재는 깔딱고개 능선과 영봉을 가로지른다. [사진 김원식]

1970년대 북한산 깔딱고개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등산객들. 하루재는 깔딱고개 능선과 영봉을 가로지른다. [사진 김원식]

예전, 육영수 여사가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 주지였던 청담 스님(1902~1971)이 법명 대덕화(大德華)를 지어줄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로 향하는 도로(청담로)는 육영수 여사의 시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청담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선묵혜자 스님은 “청담로는 청담 스님께서 신도들이 쉽게 도선사에 올라올 수 있도록 직접 공사를 총괄했다”며 “군에 대민지원을 요청해 4km 도로가 1968년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로를 건설하도록 말을 전달한 건 와전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5월 8일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북한산 도선사로 뻗은 청담로에는 오는 19일의 석가탄신일을 알리는 연등이 걸려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5월 8일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북한산 도선사로 뻗은 청담로에는 오는 19일의 석가탄신일을 알리는 연등이 걸려 있다. 김홍준 기자

현재 도로명주소 삼양로 173길인 청담로에는 도선사 셔틀버스가 다닌다. ‘셔틀택시’도 있다. 12일은 음력 4월 초하루였다. 이날 수백 명이 이 도로를 따라 절을 찾았다. 등산객도 이 도로로 올라가야 한다.

박선자(75)씨는 30여년 전 서울 보광동에서 경기도 안양으로 집을 옮겼지만, 불공을 드리기 위해 도선사를 찾는 걸음은 여전하다. 그는 “우이역도 생겨 발걸음이 쉬워졌다”고 했다.

불교 신자들에게 초하루와 보름은 각별하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불교』를 쓴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은 “달이 시작되고 기울 때, 몸과 마음을 바로잡고자 절을 찾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다음 주 초파일(19일) 야단법석을 피해서 오늘 온 것”이라고 했다.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에 따르면, ‘법석(法席)’은 원래 설법·독경·강경 등을 행하는 자리를 이른다. 후에 소란스러움, 번잡함으로 뜻이 변했다. 법석 앞에 ‘야단’이 붙으면 달라진다. 야외 설법의 자리를 말할 땐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쓰고, 떠들썩함, 부산함을 가리킬 때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 한다.

박씨는 중의적 표현을 썼던 것일까. 여하튼 석가탄신일 수천 명의 불자와 등산객이 몰려올 터. 이미 도선사에서는 이곳 도로에 일반차량 출입을 막는다고 현수막을 걸었다. 택시 운전사는 “절에서 도로 두 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농담을 했다.

하루재.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하루재.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 오체투지
“하루재에 다다르면 ‘드디어 왔구나’라며 심호흡을 하게 되요. 인수봉으로 향할지, 백운대로 갈지, 아니면 영봉을 오를지 선택은 자신이 해야죠.”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에서 바라본 서울 강북구 우이동 방향. 한 등산객이 고개를 숙여 하루재 고갯마루를 향해 힘을 자아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에서 바라본 서울 강북구 우이동 방향. 한 등산객이 고개를 숙여 하루재 고갯마루를 향해 힘을 자아내고 있다. 김홍준 기자

변기태(63) 한국산악회 회장은 출판사를 꾸린다. 사명을 ‘하루재클럽’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척박한 분야인 산서를 다룬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세로 토레』, 알렉스 호널드의 『프리솔로』 등 60여권을 번역해서 냈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1200여명의 회원에게 월 회비 1만원 받고, 매년 권당 3만~5만원짜리 책 4~5권을 보내준다.

최근에는 다른 출판사의 산서 판권을 사들여 제작한 뒤 회원들에게 나눠줬다. 회원과 출판사 모두 윈윈이었다. 변 대표는 “하루재에서는 속으로 기도, 또는 절을 해서라도 몸과 마음을 다지는 곳”이라며 “출판사도 이런 의미에서 이름 붙였다”고 말했다.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에서 바라본 인수봉. 클라이머들은 오체투지하듯 등반을 하고 있었다. 김홍준 기자

지난 5월 12일 북한산 하루재에서 바라본 인수봉. 클라이머들은 오체투지하듯 등반을 하고 있었다. 김홍준 기자

가만 보니, 도선사 주차장에서 하루재로 향하는 등산객이나 인수봉·백운대를 오르는 이들은 절을 하는듯했다. 오체투지(五體投地) 아닌가.

자현 스님은 “두 손, 두 무릎, 정수리를 땅에 대는 오체투지는 절의 원형으로, 인도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간절한, 절절한 염원이 들어있어 ‘절’로 부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는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절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체투지와 자세가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누구나 염원을 안고 하루재를 지나는 마음이야 같지 않은가.

# 불전사물
“하나 둘, 하나 둘….”
오후 5시 55분. 도선사 스님이 스트레칭을 한다. 이어 법고를 두드린다. 불경스럽게도 근육질의 드러머가 떠오른다. 경건해져야 하는데, 흥이 난다. 어쩐다. 스님은 이어 범종을 울린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속으로 셈하는지, 태껸하듯 스텝을 밟는다. 28번의 타종이 끝난 뒤 '다다 다닥다닥' 목어를 때린다. 어퍼컷 같기도, 잽을 날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운판을 친다.

지난 5월 11일 북한산 도선사에서 스님이 불전사물 중 하나인 법고를 두드리고 있다. 왼쪽 구조물은 세계건축상 대상을 받은 소울포레스트로, 위패를 영구 봉안한다. 김홍준 기자

지난 5월 11일 북한산 도선사에서 스님이 불전사물 중 하나인 법고를 두드리고 있다. 왼쪽 구조물은 세계건축상 대상을 받은 소울포레스트로, 위패를 영구 봉안한다. 김홍준 기자

스님은 이 불전사물(佛殿四物) 사이를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나온다. 불전사물은 땅과 물과 하늘의 존재들을 깨운다. 부처님께 오늘의 하루가 끝났음을 알리고 저녁 예불에 들어간다. 자현 스님은 “저녁의 타종은 모든 빛을 거두어 부처님께 올려 부처의 그늘에서 쉬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범종이 북한산을 조용히 흔들면 오체투지를 해온 인수봉과 백운대의 클라이머·등산객은 하산을 서두른다. 해가 곧 지게 됨을 안다. 범종이 울리면 하루재를 되넘어 내려와 있어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다.
이날 하루재에서 만난 24명 중 18명은 백운대에 다녀왔단다. 2030이 대부분이었다. 취준생, 대학생 등. 국립공원공단이 밝힌 백운대탐방지원센터 탐방객은 지난 3월과 4월 2만5852명. 이 기간 북한산 전체 탐방객 56만4736명의 4.6%다. 33곳의 측정소 중 5위다.

한 가족이 지난 5월 2일 북한산 백운대를 다녀온 뒤 하루재를 넘어 도선사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다.

한 가족이 지난 5월 2일 북한산 백운대를 다녀온 뒤 하루재를 넘어 도선사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백운대에 갔을까. 인수봉도 있고 영봉도 있다. 다른 길을 택해 어디선가 내려섰고, 돌아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재 들머리를 밟은 건 분명하다. 정해진 길은 없다. 길이란 수천, 수만 갈래로 흩뿌려진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부처는 누구나 될 수 있다. 30㎡ 아담한 하루재는 그렇게 심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다듬어, 스스로에게 길을 묻는 원대한 도량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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